함박눈 ― 이병률(1967∼) 행색이 초라한 어르신 게다가 큰 짐까지 든 그 곁을 따라 걷다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여 식사는 하셨느냐고 물어요 한 끼만 묵어도 되는데 오늘은 두 끼나 묵었으예 날은 추워 마음은 미칠 것 같아 담배나 몇 갑 사 드릴까 하고 담배는 피우시냐고 물어요 …
‘응답하라 1988’이 한창 인기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서울 쌍문동이다. 그런데 원래 쌍문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함석헌이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은 함석헌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곳이고, 2015년에는 그 자리에 함석헌 기념관이 개관하기도 했다. ‘함석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설조(雪朝) ―조지훈(1920∼1968) 천산에 눈이 내린 줄을 창 열지 않곤 모를 건가. 수선화 고운 뿌리가 제 먼저 아는 것을- 밤 깊어 등불 가에 자욱이 날아오던 상념의 나비 떼들 꿈속에 그 눈을 맞으며 아득한 벌판을 내 홀로 걸어갔거니 올해 화이…
봄밤의 귀뚜리 ―이형기(1933∼2005) 봄밤에도 귀뚜리가 우는 것일까. 봄밤, 그러나 우리 집 부엌에선 귀뚜리처럼 우는 벌레가 있다. 너무 일찍 왔거나 너무 늦게 왔거나 아무튼 제철은 아닌데도 스스럼없이 목청껏 우는 벌레. 생명은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열심…
갈등 ―김광림(1929∼) 빚 탄로가 난 아내를 데불고 고속버스 온천으로 간다 십팔 년 만에 새삼 돌아보는 아내 수척한 강산이여 그동안 내 자식들을 등꽃처럼 매달아 놓고 배배 꼬인 줄기 까칠한 아내여 헤어지자고 나선 마음 위에 덩굴처럼 얽혀드는 아내의 손발 싸늘한 인…
저녁눈 ―박용래(1925∼1980)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눈을 좋…
기다림 ―김규동(1925∼2011) 기다리겠어요 목숨이야 있고 없고 기다리죠 하얀 다리에서 산굽이 돌아가는 까만 점이 안보일 때까지 치맛자락 걷어 올려 눈물 닦으시던 분 그 분을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넋이야 있고 없고 해와 달을 의지해서라도 기다리겠어요 날아갑니다 휴…
산속에서 ―나희덕(1966∼ ) 길을 잃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
차마고도 ―노향림(1942∼) 목이 말라야 닿을 수 있는 길 차마 갈 수 없어도 참아 갈 수 있는 길 그런 하늘 길 생각하며 연필화의 흐릿한 연필 끝을 따라가본 것뿐인데 등 뒤가 까마득한 차마고도, 차 대신 소금 한 줌 얻으려고 연필화 끝의 희미한 멀고 먼 나라 비단길 …
오손도손 귓속말로―임진수(1926∼2001) 나무 위의 새들이 보았습니다. 해질 무렵 공원은 어스름한데 할머니와 또한 그렇게 늙은 아저씨가 앉아 있었습니다. 나무 위의 새들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황혼 집은 없어도 흐르는 세월에 다정을 싣고 오손도손 그렇게 살아…
천년의 바람―박재삼(1933∼1997)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서녘 ―김남조(1927∼) 사람아 아무러면 어때 땅 위에 그림자 눕듯이 그림자 위에 바람 엎디듯이 바람 위에 검은 강 밤이면 어때 안보이면 어때 바다 밑 더 파이고 물이 한참 불어난들 하늘 위 그 하늘에 기러기떼 끼럭끼럭 날아가거나 혹여는 날아옴이 안 보이면 어때 이별이…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1946∼)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
지상에 없는 잠 ―최문자(1943∼)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찬 비를 맞으며 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무지개를 사랑한 걸 ―허영자(1938∼)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 것 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