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가고 가을 오듯 해가 지고 달이 솟더니, 땀을 뿌리고 오곡을 거두듯이 햇볕 시달림을 당하고 별빛 보석을 줍더니, 아, 사랑이여 귀중한 울음을 바치고 이제는 바꿀 수 없는 노래를 찾는가. ―박재삼(1933∼1997)시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 유명하기 때문에 박재삼은 가…
아랫집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실려 갈 때마다 형 지훈이는 어머니, 어머니 하며 울고 동생 지호는 엄마, 엄마 하고 운다 그런데 그날은 형 지훈이가 엄마, 엄마 울었고 지호는 옆에서 형아, 형아 하고 울었다 ―박준(1983∼ )8월 늦장마가 지겹다면 박준의 시집을 추천한다. 5년 전에…
전깃줄에 쉼표 하나 찍혀 있네 날 저물어 살아 있는 것들이 조용히 깃들 시간 적막을 부르는 저녁 한 귀퉁이 출렁이게 하는 바람 한줄기 속으로 물어 나르던 하루치 선택을 던지고 빈 부리 닦을 줄 아는 작은 새 팽팽하게 이어지는 날들 사이를 파고 들던 피 묻은 발톱들 줄을 차고 날아오르는…
화난 강을 지난우리는 툇마루에 앉았다참외를 쥐고 있는 손예전부터 칼이 무서웠지그러나 무서운 건 칼을 쥔 자의 마음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칼은 알아야 한다여름의 창이 빛나고열차는 북쪽으로 움직이고강가에서사람은 말을 잃고 있었다(하략) ―김소형(1984∼ )
그러나 울지 않는 마음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버스에 앉아 울지 않는 마음 창밖을 내다보는 마음 흐려진 간판들을 접어 꾹꾹 눌러 담는 마음 마음은 남은 서랍이 없겠다 없겠다 없는 마음 비가 오면 비가 오고 버스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곳에 나를 놓아두는 것 나는 다만 기다리는 …
아이들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교실 창 밖 강 건너 마을 뒷산 밑에 보리들이 어제보다 새파랗습니다 저 보리밭 보며 창가에 앉아 있으니 좋은 아버지와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 하시던 형님이 생각납니다 운동장 가에 살구나무 꽃망울은 빨갛고 나는 새로 전근 와 만난 / …
슬픔이 인간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유병록(1982∼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좋은 것이라고 배웠다. 비가 와야 싹이 트고, 곡식이 자라고, 열매가 맺힌다고 했다. 물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배웠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고, 기본 4원소의 첫…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 나를 …
어제의 괴로움 짓눌러주는 오늘의 괴로움이 고마워 채 물 마르지 않은 수저를 또 들어올린다 밥 많이 먹으며 오늘의 괴로움도 대충 짓눌러버릴 수 있으니 배고픔이 여간 고맙지 않아 내일의 괴로움이 못다 쓸려 내려간 오늘치 져다 나를 것이니 내일이 어서 왔으면, 일찍 잠자리에 든다 자고…
나는 지은 죄와 지을 죄를 고백했다 너무나 분명한 신에게 빗줄기의 저항 때문에 노면에 흥건한 빗물의 저항 때문에 핸들이 이리저리 꺾인다 지워진 차선 위에서 차는 비틀거리고 빗소리가, 비가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차 안을, 메뚜기떼처럼, 가득 메웠다 내 가슴을 메뚜기들이 뜯어 먹고…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공단 지대를 경유해 온 시내버스 천장에서 눈시울빛 전등이 켜지는 저녁이다/손바닥마다 어스름으로 물든 사람들의 고개가 비스듬해지는 저녁이다 다시,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저녁에 듣는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는/착하게 살기에는 너무 피…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정호승(1950∼ )바람은 서정시인들의 오랜 친구다.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그것을 시인들은 몹시나 좋아한다. 그 까…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들 지나가던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버려진 개 한 마리 데려다 놓고 얼마 전 떠나 버린 사람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슬픔을 더 슬프게 하는 건 시만 한 게 없지 개 한 마리 데려왔을 뿐인데 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는다 흰 슬픔 검은 슬픔 누런 슬픔 큰 슬픔 작은 슬픔 슬픔이 슬픔을 알아본다 갈피를 꽂아 두었던 시의 가…
우리 절 밭두렁 벼락 맞은 대추나무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 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해를 보냅니다 ―조오현(1932∼2018)5월은 좋은 달이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으며 햇살은 화창하고 꽃들은 만발한다. 돈을 낸 것도 아니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날씨는 기꺼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