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모여서 이야길 한다 물이 모여서 장을 본다 물이 모여서 길을 묻는다 물이 모여서 떠날 차빌 한다 당일로 떠나는 물이 있다 며칠을 묵는 물이 있다 달폴 두고 빙빙 도는 물이 있다 한여름 길을 찾는 물이 있다 달이 지나고 별이 솟고 풀벌레 찌, 찌, 밤을 새우는 물이 있다 뜬눈…
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한성기(1923∼1984)나는 …
여보내 마음은 유린가 봐, 겨울 한울처럼이처럼 작은 한숨에도 흐려 버리니……만지면 무쇠같이 굳은 체하더니하로밤 찬 서리에도 금이 갔구료눈포래 부는 날은 소리치고 우오밤이 물러간 뒷면 온 뺨에 눈물이 어리오타지 못하는 정열, 박쥐들의 등대밤마다 날어가는 별들이 부러워 쳐다보며 밝히오여보…
우리 두 목숨에 이 한 번이면 흡족합니다 신이여 구원을 베푸소서 여윈 초 한 자루도 신목인양 바라뵈는 통절한 눈짓 이러한 저희를 살펴주소서 불빛 지워지고 심지마저 수은처럼 식어버리고 그뿐, 하늘의 어느 별 하나라도 사람을 위해 슬퍼하는 것이랍디까 견디며 견디며 살아야지요 목에도 가…
포플라나무 꼭대기에 깨어질 듯 밝은 차운 달을 앞뒷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개가 짓는다. 옛이야기처럼 구수한 문풍지 우는 밤에 마귀할미와 범 이야기 듣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따슨 아랫목 할머니는 무덤으로 가시고 화로엔 숯불도 없고 아 다 자란 아기에게 젖 줄 이도 없어 외로이 돌아…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
개천에서 아픈 개 비린내가 난다 죽기로 작정한/ 개가 온 힘을 다해/ 손바닥을 핥아주고 있는 것 같다 만나자마자/ 컵에 물을 채운다/ 내가 한 번/ 네가 또 한 번/ 너를 위해 얕게/ 나를 위해 네가 또 얕게/ 컵/ 하나에 물을 따르고/ 물을 나누어 마신다/ 네가 한 번/ 내가 또…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꽃 같은 시절이야 누구나 가진 추억 그러나 내게는 상처도 보석이다 살면서 부대끼고 베인 아픈 흉터 몇 개 밑줄 쳐 새겨 둔 듯한 어제의 그 흔적들이 어쩌면 오늘을 사는 힘인지도 모른다 몇 군데 옹이를 박은 소나무의 푸름처럼 ―박시교(1947∼ )니체는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
뒤뜰 어둠 속에 나뭇짐을 부려놓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무 한 쪽을 예쁘게 깎아 내셨다. 말할 힘조차 없는지 무쪽을 받아든 채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으시는데 환히 드러난 아버지 이마에 흘러 난 진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에서 후들거리는 발끝걸음으로 어둠길 …
날이 흐리다/곧 눈이 흩날릴 것이고/뜨거운 철판 위의 코끼리들처럼 춤을 추겠지/커다랗고 슬픈 눈도 새하얀 눈발도 읽어내기 어렵다/저 너머에만 있다는 코끼리의 무덤처럼 등이 굽은 사람들/시곗바늘 위에 야광별을 붙여놓은 아이는 아직 시간을 모른다/낮과 밤을 모르고/새벽의 한기와 허기를 모…
여자는 털실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리고 스테인리스 대야에 파김치를 버무린다.스테인리스 대야에 꽃소금 간이 맞게 내려앉는다.일일이 감아서 묶이는 파김치.척척 얹어 햅쌀밥 한 공기 배 터지게 먹이고픈 사람아.내 마음속 환호는 너무 오래 갇혀 지냈다.이윤학(1965∼)
(상략) 그러나 그 눈사람은/예전에 알던 눈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거의 기를 쓰고 눈사람이 되어보려는 눈덩이에 가까웠고/떨어져 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 모아보려는 새하얀 외침에 가까웠고/그건 퇴화한 눈사람이었고/눈사람으로서는 신인류 비슷한 것이었고/눈사람은 이제 잊혀가고 있다는 사실…
(상략) 외롭고 슬픗할 때면 감나무 아래 기대 앉아서 저문 햇빛 수천 그루 노을이 되어 아득하게 떠가는 것 보았습니다. 흐르는 노을 그냥 보내기 정말 싫어서 두 손을 꼭 잡고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깜박 밤이 되면은 감나무는 하늘 위로 달을 띄워서 하늬바람 가는 길 내어 주지요. 사…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이성선(1941∼2001)선생이라는 직업이 점차 사라져 간다고 한다. 아이들은 줄어들고 인터넷과 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