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큰 나라 틈에 있어 늘 누군가에 의지하여 지내 버릇한 까닭에, 나라의 평화를 남만 믿고 있는지라… 남의 나라 힘을 빌려 자기 나라 사람들을 서로 해치는 일이 많이 생겼다.’ 조선을 둘러싼 각축전을 보고하는 일본 외무대신의 의회 연설이 독립신문에 실렸다. 1897년 3월 2…
왕이 경복궁의 북쪽 담장 너머 경무대(景武臺)로 나섰다. 과거시험 참관을 위한 행차다. 북악 기슭 경무대는 주로 무예 훈련장이고, 연중 몇 차례 과거시험장이 되는 곳이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다. 지금도 청와대 정문 바로 앞에 선 그 신무문(神武門)을 지나 임금이 가마에서 내리고,…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뒤뜰에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백송이라는 그 이름처럼 하얀 줄기의 이 천연기념물은 나이가 수백 살이라 한다. 여러 세기에 걸쳐 이 나무가 굽어보는 주위에 많은 집과 사람이 명멸했다. 헌법재판소가 창설되어 이곳 재동에 청사를 짓고 입주하기까지 근 8…
1946년 1월 14일. 경복궁 앞 광장에 태극기가 올라갔다. 일장기가 내려간 옛 조선총독부의 30m 높이 두 깃대 중 하나에는 미 군정청의 성조기가 걸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었다. 광복 이후 만 5개월 만의 국기 게양식이었다. “국권과 국토를 빼앗긴 이 겨레에 새 희망과 해방…
“책은 정신의 양식. 요사이 청년들은 주로 어떠한 서적과 잡지를 보는가. 시내 각 서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적은 사상서와 문예서가 많이 읽힌다. 잡지는 일본에서 발행하는 ‘개조(改造)’가 가장 인기.”(동아일보 1921년 12월 27일자) 먹을거리 못지않게 읽을거리도 변변치 …
‘시신을 실은 중국 군함이 월미도에 도착. 조선 배에 옮겨 싣고 서울로 출발.’(고종실록 1894년 3월 9일자·이하 음력) 중국 상하이에서 피살된 김옥균이 조선에 송환되었음을 알리는 경기도 관찰사의 보고다. 갑신년에 정변을 일으키고 일본 배로 인천항을 떠난 김옥균은 갑오년에 중국…
‘창궐하는 구제역은 소뿐 아니라 마침내 돼지에까지 그 마수를 펴게 되었다. 이런 형세로 구제역 종식은 힘들며 방역책도 없는 형편이다.’(동아일보 1933년 4월 8일자) 1933년 3월 평안북도의 한 군에서 발생한 구제역이 확산을 거듭하며 남하했다. 대책이라고는 그저 다른 지역으로…
외교장관을 지낸 후 유엔 사무총장. 그리고 대통령 당선. 제8대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에 앞서 제4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쿠르트 발트하임의 약력이다. 발트하임 하면, 유엔 사무총장 중에서도 비교적 한국인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그가 재임한 1972년부터 1981년까지는 유엔의 목소리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나란히 입국한 미국발 하얀 계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한국 시장에 출하됐다. “달걀이 왔어요, 달걀.” 미국에서 식량을 원조 받던 1950년대를 포함해 오랜 기간 동네 어귀에 복음처럼 울려 퍼지던 그 소리가 먹을 것투성이로 변모한…
항공모함을 앞세운 중국 전단(戰團)이 미국 일본 한국의 요충 주위를 휘저으며 한 달간 원정을 벌였다. 이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에서 중국이 내보인 전투 장비에는 한국에 특히나 익숙한 이름들이 붙어 있다. 주역인 항공모함의 이름은 ‘요령(遼寧)’이다. 랴오닝으로 표기되지만 이는 근래의…
일본 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 논란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방해하는 중국의 언동이 동시 진행 중이다. 두 사안에 공통점이 있다면 각기 쌍방이 상대의 태도를 도발로 받아들인다는 점일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겪는 복잡한 심적 콤플렉스는 그 뿌리가 …
‘새해에는 새 마음을 먹어, 벼슬만 제일 사업으로 여기지들 말고, 자기 직분과 도리에 전념하며, 나라 법을 제일 중한 명령으로 알고….’ 정유년 새해맞이 신문의 몇 구절을 모아 본 말이다. 120년 전 독립신문 1면 논설인데, 공직자와 국민 일반을 향한 절절한 당부가 담겨 있다. ‘…
한 해를 닫는 주간이니 이 해를 돌아보는 가까운 시간여행으로 이번 회를 대신할까 합니다. 올해의 상징어로 일본에서는 ‘金(금)’, 중국은 ‘規(규)’ 같은 글자들이 뽑혔다지요. 한국은 ‘君舟民水(군주민수)’가 선정되었답니다. ‘군주는 배, 백성은 물.’ 만약 시간여행 코너에서 올 …
야당이 두어 개 분립해 있는 판에 여당이 다시 두 쪽으로 나뉘는 판국이다. 역사 교과서 같은 데서 듣곤 하던 이른바 사색당파의 재림인가. 지금처럼 정당이 없던 왕정 시대에도 당파는 있었다. 유권자가 없고 유권자와 연결되는 조직체가 없다 뿐이지 일인 권력의 궤도를 따라 정치적 이권과…
한국에서 탄핵 정국의 폭풍이 몰아친 지난 주말, 지구 반대편 스웨덴에서는 노벨상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문학 부문 수상자 밥 딜런은 예정대로 불참했다. ‘육신은 가지 못하여도 정신은 여러분과 함께한다’로 시작하는 수상 연설을 현지 미국대사가 대독했다. ‘어디에 있었니 내 아들아’라는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