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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우울의 씨앗을 꽃으로 피워내는 건 우리 몫

    [동주의 길]우울의 씨앗을 꽃으로 피워내는 건 우리 몫

    그가 죽고 열흘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집에 왔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5년 3월 6일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집도하는 장례식에서 윤동주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송되었다. …

    •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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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동주의 길]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1943년 5월일까, 6월일까. 여름날 아침 그는 교토 남쪽에 있는 우지(宇治)강으로 도시샤대 친구들과 놀러 갔다. 점차 아침 물안개가 걷히며 짙은 에메랄드빛을 튕겨내는 강물은 물살이 빠르고 깊어 보였다. 강가에는 이른 아침인데 벌써 강태공들이 여기저기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다.…

    • 201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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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등불을 밝혀, 시대처럼 올 아침

    [동주의 길]등불을 밝혀, 시대처럼 올 아침

    이 글을 중국의 다롄민족대에서 쓴다. 이 대학에서 열리는 ‘소수문학 학술대회’에서 윤동주를 소수자(少數者)문학 작가로 거론하고 있다. 중국인과 조선족도 윤동주를 소수자문학인으로 본다. 중국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 평양과 경성을 거쳐 일본으로 갔던 그의 생애는 디아스포라 소수자문학의 특…

    • 201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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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동주의 길]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기차를 타고 신촌역에서 내려 통학했었다. 반듯한 목조 기와집의 신촌역은 작지만 군색하지 않았다. 매표소 앞 나무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을 그리며 ‘사랑스런追憶’ (1942년 5월 13일)을 썼던 청년.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

    • 2017-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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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터널을 지나 이윽고 그곳으로

    [동주의 길]터널을 지나 이윽고 그곳으로

    한 여성 노동자가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갔다. 불황이기에 평양에 있는 열두 개 고무공장 사장들이 2300여 노동자에게 임금을 못 주겠다고 통고했다. 노동자들은 굶어 죽겠노라며 ‘아사(餓死)농성’을 시작했고, 1931년 5월 29일 평양 평원고무공장의 여성 노동자 강주룡이 최초의 고공투…

    •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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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동주의 길]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동주는 말이 없다가도 이따금 한마디씩 하면 뜻밖의 소리로 좌중을 놀라게 했다”는 친구 유영의 증언처럼, 말수 적은 동주가 글을 남기지 않은 두 번의 침묵기가 있었다. 1938년 연희전문 1학년 9, 10월경 몇 편 쓰고 9개월쯤 지나고, 2학년 1939년 9월에 ‘자화상’, ‘투루게…

    • 201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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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모욕을 참아라, 진정 이적이 찾아올지니

    [동주의 길]모욕을 참아라, 진정 이적이 찾아올지니

    서울 마포구 지하철 홍대입구역이나 합정역 언저리 어디에 그의 자취가 있을까. 젊은 영혼들이 반갑게 만나고 헤어지는 번화한 거리는 1938년 너른 들녘이었다. 이 들녘에 연희전문에 입학하고 두 달 보름 지난, 스물한 살 윤동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

    •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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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동주의 길]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윤동주는 숲에서 글을 구상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송림 속, 게다가 덩그러니 살림집은 외따로 한 채뿐’(‘종시’)이라고 할 만치 연희전문 핀슨홀 기숙사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도 연세대에는 청송대라는 작은 숲이 있다. 숲과 화원은 그의 상상력을 잉태…

    • 201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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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금지된 언어를 지킨 스승과 제자

    [동주의 길]금지된 언어를 지킨 스승과 제자

    언어의 역사는 얼마나 장구한가. 원시인들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중세 언어인 라틴어나 한문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근대에 들어 민족어가 탄생하면서 개인은 비로소 단독자로서 자유를 얻는다.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후, 한글은 조선인에게 존재와 자유를 주었다. 1938년 2월…

    • 2017-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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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북간도의 12월, 추울수록 따스해진 詩心

    [동주의 길]북간도의 12월, 추울수록 따스해진 詩心

    1936년 3월 다시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4월 6일 5년제 일본학교인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대학에 진학하려면 기독교계나 민족계가 아니지만 광명중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다. 착잡한 심경을 시 ‘이런 날’(1936년 6월 10일)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오…

    • 201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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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신사참배 거부, 자퇴… 식민지 현실을 만나다

    [동주의 길]신사참배 거부, 자퇴… 식민지 현실을 만나다

    “이제 북한에서도 윤동주를 언급하기 시작했어요.” 1993년 스승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일본 와세다대)께서 복사물 몇 장을 주셨다.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는 분의 약간 달뜬 표정이 낯설었다. 윤동주를 과대평가된 작가로 폄훼하고 있었던 미물이 스승의 깊은 뜻을 알 리 없었다. 종이 몇…

    • 2017-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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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어두운 방,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동주의 길]어두운 방,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중국 연길(延吉) 버스터미널에서 용정(龍井)에 가는 표를 사서, 버스를 타고 30∼40분쯤 달리면 용정 시내에 도착한다.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제1용정중학교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제1용정중학교 교문에 들어서면 학교 교실 건물이 보이고, 왼편에 운동장이 있다. 축구 선수였던 윤동주를…

    • 2017-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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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소년 동주, 만주땅에서 역사와 詩를 만나다

    [동주의 길]소년 동주, 만주땅에서 역사와 詩를 만나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으로 파괴된 만주는 서글픈 변두리였다. “돈 벌러 간 아버지 계신 만주땅”(‘오줌싸개 지도’)은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유랑지였다.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 명동촌(明東村),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변두리에서 1917년 12월 30일 한 …

    • 2017-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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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주의 길]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동주의 길]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1943년 7월 14일, 일본 유학 중이던 윤동주는 교토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 차가운 감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28년의 짧은 생. 하지만 청년 시인 윤동주의 울림은 우리에게 지금도 여전하다. 윤동주 탄생 100년(12월 30일)…

    • 2017-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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