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간에 걸친 단식을 끝낸 남자는 큰 판지를 들고 서 있었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그것은 행동하는 단어다.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앞의 두 문장은 그가 좋아하는 트립합 밴드 ‘매시브 어택’의 ‘눈물방울’에 나오는 노랫말로 그가…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왕이 밭을 갈아 모범을 보이며 풍년을 기원하는 날. 왕의 쟁기는 금으로, 신하들의 쟁기는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왕이 쟁기를 잡고 출발하자 신하들도 출발했다. 화려한 의식이었다. 그런데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의 몸은 앙…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지혜의 빛을 잃지 않는 고전이 있다.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장자크 루소의 ‘에밀’은 그러한 고전이다. ‘교육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교육에 관한 이야기다. 그중 4권에 나오는 연민 이야기는 지금도 유효하다. 루소는 이렇게 질문한다. 왕은 신하들에 대한 …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폐회식에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의 도입부가 흘러나왔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크로스컨트리 매스스타트 50km 종목의 우승자가 러시아 선수였기 때문에 러시아 국가가 흘러나왔어야 했다. 폐회식은 마라톤에 해당하는 그 종목의 시상식을 겸하는 자리였다. 그…
작가의 작가, 예술가의 예술가인 사람들이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그러한 작가 중 하나다. 작가들은 물론이고 매릴린 먼로, 더스틴 호프먼 같은 배우들까지 그를 우러러보았다. 가수인 레이디 가가는 아예 릴케의 말을 팔에 문신으로 새겼다. 사실 그의 문신은 릴케의 편지에 나오는 독일어…
서양에서는 가족 사이에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세계적인 법의인류학자 수 블랙이 쓴 죽음에 관한 명저 ‘남아 있는 모든 것’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딸의 사연이 나온다. 자기 얘기다. 어머니는 죽어가고 있었다. 모르핀을 맞아 혼수…
자식은 부모에겐 늘 아이다. 어른이 되어도 품어줘야 하는 어른아이. 신경숙 작가의 ‘아빠에게 갔었어’는 그러한 아빠와 딸에 관한 소설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의 희생적인 삶에 관한 감동적이면서 가슴 시린 이야기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화자이자 작가인 딸이 아버지에게서 위로를 받는 이…
살다 보면 한 번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거나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 있다.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어? 우스갯소리지만 세상을 충분히 살지 않은 아이나 젊은이에게는 감히 할 수 없는 질문.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도 생전에 그런 질문을 받았다. 그는 그 경험을 ‘일 잘하…
고통스러우면서도 따뜻하고, 따뜻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화가의 눈이 느껴지는 그림이 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슬픔’이 그러하다. 단색으로 된 데생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그림 속의 여자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무릎에 팔을 …
겉으로는 어른이어도 속으로는 아이인 사람들이 있다. 유년 시절에 깊은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이 종종 그러하다. 최진영 작가의 ‘내가 되는 꿈’은 그러한 아이, 그러한 어른에 관한 소설이다. 아이의 부모는 늘 싸웠다. 서로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격렬하게 싸웠다. 아이가 울기도 하고 소리…
음악은 폭력을 재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그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자 미덕이다. 폭력을 어떻게든 순화시키는 마술 아닌 마술을 부리는 것이 음악의 속성인 탓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복수의 이중창 ‘그래, 복수다’는 그 마술에 대한 생생한 증거다. 궁정광대…
“특권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우연입니다. 특권의 아들은 누구입니까? 남용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명작 ‘웃는 남자’에 나오는 말인데, 특권도 우연히 갖게 된 것뿐이니 남용하지 말라는 의미다. 소설의 배경은 특이하게도 영국이다. 귀족들이 투표를 하려고 상원에 모였다. 여왕의 남편 세비…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하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알거지가 되어 나타났다. 해진 옷과 찢어진 신발에 피골이 상접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바라…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여전히 불편한 이야기가 있다. 1948년에 발표된 셜리 잭슨의 단편 ‘제비뽑기’는 그러한 소설이다. 누군가에게 행운이 아니라 끔찍한 불행을 안겨주는 이야기라서 더욱. 소설에 나오는 마을에서는 매년 6월 어느 날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인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
고통의 산물임이 분명함에도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림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서 전시 중인 이성자 화가의 ‘천년의 고가’가 그렇다. 그가 진주에서 살았던 옛집을 형상화했다는 그림이 왜 그러한지 알기 위해서는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가 이 그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