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끝나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들은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느라 바빴다. “교수가 강단에서 울었어.” 일본 메이지대의 데라시마 젠이치 교수가 울음의 주인공이었다. 2002년에 동료 교수와 공동으로 개설한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넘어서―스포츠, 평화, 공생’이…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는 ‘오이디푸스 왕’이나 ‘안티고네’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마음의 상처에 대해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필록테테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던 그리스군 장수였다. 그에게는 과녁에 백발백중 명중하는 활이 있었다. 그가 트로이로 가는 도중에 독사에게 발을…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만 보면 다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더러 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2003년도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존 쿳시의 소설 ‘노인과 고양이’는 동물을 둘러싼 모자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아들은 늙은 어머니가 못마땅하다. 자식 가까이에서 살라…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사랑의 감정만이 아니라 편견까지도 물려받는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어른들처럼. 김혜진 작가의 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에는 엄마와 단둘이 사는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나온다. 어렵게 살아도 구김살이 없는 아이다. 그런데 아이가 어느 날…
“당신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나에게는 미움도 없고 복수심도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향해 어떤 어머니가 한 말이다. 사원에서 기도 중인 아들을 이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인 사람을 대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지난 1년 반이 그 어머니에게는 악몽이었다. 어머니는 …
일제에 국권을 상실한 조선은 슬프고 외롭고 비참했다. 스코틀랜드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눈에 비친 모습은 그러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919년 3월 28일이었다. 3·1운동으로 한국인들이 무자비한 탄압을 받을 때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평화롭게 만세를 불렀을 뿐인데…
할머니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창고에서 수수 한 자루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정원에 뿌리면서 말했다. “하느님의 새들을 위해.” 그러고는 달걀을 모아서 마당에 던지며 말했다. “우리의 개와 고양이를 위해.”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각종 씨앗을 꺼내 텃밭에 뿌리며 말했다. “땅에서 살아라.” 할…
누군가가 어떤 청년에게 왜 의사가 되지 않고 약사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 청년의 답은 이러했다. “의사는 때로는 많은 장비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약사는 응급상황에서 약으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경제적인 개념에서 접근하고 재단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좀처럼 …
코로나19 사태처럼 실존적 위기에 처할 때 소환되는 작품들이 있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의 희곡 ‘하얀 역병’도 그중 하나다. 이 희곡은 몸에 하얀 반점이 생기면서 사망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세계를 휩쓰는 상황을 펼쳐 보인다. ‘베이비페이스’라는 별명을 가진 의사가 …
“아버지가 제게 돌아오셔도 발진이 나고 아버지가 돌아오셔도 마마에 걸릴까요?” 네 살짜리 아이가 천연두에 걸렸을 때 어머니에게 했다는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머나먼 곳에서 유배 중이었다. 아버지가 옆에 있다고 병이 나을 리는 없겠지만, 아이의 마음에는 자신의 병이 아버지의 부재와 모종…
형식에 치우치거나 타성에 젖어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을 놓칠 때가 있다. 페르시아 시인 루미가 전하는 이야기는 그 점을 파고든다. 어느 날 모세는 양치기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느님,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신발을 수선해 드리고 머리를 빗겨 드…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좋아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해롭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일화를 인용하여 그 이유를 설명한다. 기원전 522년,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였다. 그는 이집…
아이들에게 어두운 역사를 말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적으로 말하자니 너무 폭력적이고 침묵하자니 너무 무책임해 보인다. 권윤덕 작가의 어린이용 그림책 ‘나무 도장’은 이런 고민에서 시작된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어머니와 딸이 등장한다. 두 사람이 혈연관계가 아니면서 모녀가 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로벤섬은 예전에는 감옥섬이었다. 그곳에 수용된 정치범들은 한 권의 책만 갖고 있을 수 있었다. 정치적인 내용은 허용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 전집이 허용되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그런데 가족이 보낸 힌두교 그림엽서를 전집 표지에 붙여 힌두교 경전으로 위장한 사람이 있…
인간은 때때로 다른 인간을 물건처럼 이용하고 버린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그런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라고 한다. 두 사람 사이 대등한 ‘나-너’의 관계가 아니라 한쪽이 다른 쪽을 이용하는 ‘나-그것’의 관계, 이 관계는 특히 전쟁 중에 날것으로 드러난다. 중국계 미국 작가 하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