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 나오는 하갈의 이야기는 슬프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종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라에게 등을 떠밀려 아이를 낳아야 했고, 사라가 나중에 아이를 낳자 결국에는 사막으로 쫓겨났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 ‘하갈의 노래’는 그러한 슬픈 사연을 형상화한다. 소설은 역사에…
트라우마는 충격적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만 발생할 것 같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물려지기도 한다. 조경란 작가의 ‘복어’는 그러한 트라우마에 관한 사유로 가득한 소설이다. 할머니가 선택한 죽음이 소설의 한복판에 있다. 서른 살이었던 할머니는 복엇국을 끓여 자기 것에만 독을 넣어 먹고 죽었…
위대한 예술가라고 모든 말과 행동이 위대한 것은 아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경우에도 그렇다. 그가 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나 일기를 보면 그의 아버지는 천박하고 속물적이고 위압적인 폭군으로 묘사된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할까. 아버지는 그가 쓴 글들을 읽지 않았지만 만약 읽…
전쟁은 인간의 민낯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더 비열해지고 누군가는 더 인간적이 된다. 방수포를 씌운 트럭을 타고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검문소에 도착하자 젊은 러시아 군인이 다가온다. 그의 눈이 트럭에 탄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검은색 숄을 두른 젊은 기혼 여성에게 멎는다. …
‘삼국사기’에 솔거라는 화가가 나온다. 얼마나 그림을 잘 그렸던지 그의 그림은 신화(神畵), 즉 신이 그린 그림으로 불렸다. 그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는 비늘 같은 줄기, 구불구불한 가지 등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새들이 진짜 소나무로 착각하고 날아와 앉으려다 벽에 부딪혀 떨어질 정도…
신의 노여움을 사 죽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죽음을 피할 유일한 길은 누군가가 그를 대신하여 죽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알케스티스’에서 어떤 사람이 처한 실존적 상황이다. 누구도 그를 위해 죽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대신 죽는다. 그는 아내(알케스티스)가 …
낮은 자 중에서도 더 낮은 사람들이 있다. ‘로마’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로마라고 하면 이탈리아 로마를 떠올리겠지만 유랑의 삶을 사는 집시가 로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유대인, 정신질환자와 더불어 “해결”하려고 했던 사람들. 그들은 스스로를 집시가 아니라 로마라고 부른다.…
시련 때문에 깊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김지하 시인이 그랬다. 그의 회고록에 나오는 고등학교 때의 이야기 하나. 그는 대수 과목에는 흥미가 없어 “겨우 빵점을 면하는 정도였다”. 어느 날 대수 시간에 교재 여백에 낙서를 하다가 선생에게 들키고 말았다. 선생은 그의 머리를 마구 때리더니,…
유년의 순수함에 관한 이야기는 늘 뭉클하고 아련하게 다가온다. 우리의 순수한 옛 자아에 관한 것이라서 더욱 그러한지 모른다. 이야기는 새끼 제비에서부터 시작된다. 착한 흥부에게 기적의 박씨를 물어다 주던 제비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제비. 제비 부모는 새끼들이 태어나자 열심히 먹이를 잡…
“당신도 우리처럼 어리석었습니다.” 어떤 시인이 동료 시인을 애도하며 쓴 말이다. 애도의 말치고는 무척 낯설다. 더욱이 마흔 살 넘게 차이가 나는 거장을 향한 말치고는 무례하기까지 하다. ‘W. B. 예이츠를 추모하며’라는 W. H. 오든의 시에 나오는 말이다. 오든이 이 시를 쓴 것…
네다섯 살쯤 된 소년의 눈앞에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진다. 한 살 위인 누나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져 몸을 비틀고 숨을 헉헉거린다. 그는 옆에 누워 누나를 안심시키려고 말을 건다. 안쓰러운 마음이 그에게서 흘러나온다. 그는 누나가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지 못하고, 누나가 발작…
인간은 때때로 신화의 힘을 빌려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신화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득한 옛날, 어느 산골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두가 지독하게 가난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희한한 풍습이 생겼다. 누구든 일흔 살이 …
문학은 이따금 우울한 세상을 비춤으로써 독자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일종의 거울이다. 김혜진 작가의 ‘중앙역’은 그러한 거울이다. 이 나라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노숙자들 얘기다. 가장 우울한 장면 중 하나. 한밤중에 응급차가 광장에 도착한다. 누군가가 쓰러져 있다. 차마 눈 뜨고…
예술은 환대를 가르친다. 다르고 낯선 것에 대한 환대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중국시인 쉬즈모(徐志摩)의 ‘케임브리지를 다시 떠나며’는 예술이 지닌 그러한 속성을 잘 보여주는 시다. 이 시는 제목이 암시하듯 시인이 케임브리지를 다시 찾았다가 떠나면서 느끼는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다. 이…
도스토옙스키의 나라가 전쟁 중이다. 이런 때 그가 소환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는 위대한 작가였지만 이념적으로는 국수주의자에 가까웠다. 폴란드와 관련해서는 특히 그랬다. 폴란드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베르디치우에서 태어난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가 그를 싫어한 것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