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굣길, 아이들은 가방과 옷을 벗어두고 곧장 바다로 뛰어들었고, 해질녘 집으로 향했다. 여름방학 전까지 섬 아이들 일상이었다. 학교와 바다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자맥질하며 놀고 있을 때 양동이와 족대를 든 선생님이 우리를 불렀다. 양어장에 넣을 물고기를 잡아달…
전국의 어촌을 다니며 수많은 종류의 배를 탔고, 일손을 거들기 위해 뱃일을 익혔다. 어민 생활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선원처럼 노동에 동참했다. 울산 제전마을에 10개월간 상주하며 해양 문화를 조사할 때 장어잡이 어선에서 투망과 양망하는 일을 자주 도왔다. 선장 눈에는 물가에 내놓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물고기 떼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때를 기다리는 침묵의 사냥꾼이 있다. 이른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군사지역에 머무는 망지기 노인을 만나려는 시도는 여러 번 무위로 돌아갔다. 조업 막바지 시기였기에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했다. 애타는 마음에 항구…
섬을 비우던 때가 있었다. 섬 거주민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은 왜구의 침탈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고, 섬이 왜구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또 죄인이 섬으로 도망쳐 숨는 것을 방지하고, 조세 수취와 부역 동원의 편의를 위한 방편이었다. 섬은 방어와 중앙집…
난바르 촬영을 위해 해녀 운반선에 승선했다. 여러 날 이 섬 저 섬을 돌면서 배 위나 섬에서 숙식하며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을 ‘난바르’라 한다. 운반선이 방파제 밖으로 나가자마자 거친 파도가 뱃머리에 부딪혔다. 물질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선장은 배를 선착장으로 되돌렸다. 내친김에 해녀…
물고기 잡는 장면을 촬영하려고 새벽 2시에 어선을 탔다. 배 위에서 파닥거리는 작은 물고기들은 용광로처럼 보였다. 어종마다 튀어 오르는 몸짓이 달랐고, 달빛에 비친 비늘은 은색으로 빛났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 항구에 도착하려고 선장은 배의 속력을 높였다. 먼저 도착한 어선 수십 척이 …
가덕도 해양문화를 조사하던 필자는 지역 해녀가 아님에도 바다로 뛰어드는 해녀들을 먼발치에서 봤다. 어디서 왔는지 알기 위해 뭍으로 나올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렸다. 4명의 해녀가 물질을 마치고 해안가로 나와서 쉴 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부산 영도에 거주하는 제주 출신 해녀로 젊…
“송일만 어귀에서 대형 수송선박들은 만의 양쪽 돌출부에서 바다 한가운데로 뻗어나온 방파제 끝의 좌록우적(左綠右赤) 무인등대 사이를 통과했다.” 김훈의 단편소설 ‘항로표지’의 문장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다. 왜 좌록우적(왼쪽에 녹색, 오른쪽에 적색)이라고 했을까?…
‘텃세’라는 말. 귀어(歸漁)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막막하고, 어민들은 억울하다. 필자는 어촌 곳곳을 다니며 해양문화를 조사하면서 양쪽 말을 종종 듣는다. 귀어인들의 불만은 “바다에 주인이 어디 있냐? 어촌계 장벽이 높다. 외지인에게 야박하다”로 귀결된다. 반면 어민들은 “어촌에 대한 …
남해도의 어촌을 조사하던 2012년 여름. 정치망(물고기가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오기 어렵게 만든 어구)에 잡힌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작업에 동행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다. 그물을 올리자 잔뜩 잡힌 멸치 속에 80cm 내외의 물고기 대여섯 마리가 섞여 있었다. 선장은 ‘돈 되는 건…
“승상 거북, 승지는 도미, 판서 민어, 주서 오징어, 한림 박대, 대사성 도루묵, 방첨사 조개, 해운공 방개, 병사 청어, 군수 해구, 현감 홍어, 조부장 조기, 부별 낙지, 장대, 승대, 청다리, 가오리, 좌우나졸 금군 모조리, 상어, 솔치, 눈치, 준치, 멸치, 삼치, 가재, 개…
침몰된 여객선에서 생존한 해녀를 추적하다가 참담한 사실을 알게 됐다. 가덕도 노인들에게 기억나는 과거 사건을 물었더니 너나없이 ‘한일호 침몰’을 들었다. “방파제와 해변가 몽돌밭에 수십 구의 시신이 누워 있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00명이 넘게 탔는데 12명만 살았어요. 그날은…
“독일에서 40년 넘게 살아 보니 가족이나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옅어지고,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만 갔어요. 독일에서는 김치찌개, 된장찌개가 그렇게 먹고 싶더니 남해독일마을로 이주하니 이제는 독일 빵과 소시지가 생각나요.” 독일에서 수십 년을 살다가 남해독일마을로 이주한 파독…
잡은 물고기를 바다 위에서 매매하는 대규모 어시장이 열리던 때가 있었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냉동시설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1960, 70년대까지 파시(波市)가 열리는 바다는 성황을 이뤘다. 연평도 위도 흑산도는 조기, 욕지도 거문도 청산도는 고등어, 임자도 덕적도 신도는 민어 파시가 …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소하지 않다. 현재의 생활상을 기록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을 적는 행위가 아니라 사실과 사실을 엮어서 만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주민들과 함께 사계절을 보내며 울산의 어촌을 조사할 때다. 해녀 물질이 끝날 즈음이면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