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내리고 나면 레돔은 늘 밭으로 갔다. 눈 내린 밭에 무슨 할 일이 있다고? 밭의 어느 쪽 눈이 가장 먼저 녹는지, 어느 쪽이 가장 오래 남아있는지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2월이 되면서 언 땅이 녹자 그는 겨울 내내 틈만 나면 했던 막대기 …
“이거 말고 다른 신발 있잖아. 조금 더 큰 거, 그건 어디 있지? 여기 뒀는데.” 그가 지난해 신었던 털신발을 여기저기 찾아다닌다. “여기 있잖아!” 바로 갖다 줬더니 이것보다 조금 더 큰 것이 분명 있었다고, 여기 뒀다고 말한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알고 보니 신발은 그대로인데…
“이것 봐. 효모가 또 이만큼 나왔네.” 레돔이 술 탱크 갈이를 하면서 나온 효모를 한가득 들고 왔다. 찰랑이는 우유 바다를 한 바가지 떠온 것 같다. 바야흐로 빵을 구워야 하는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지난해 12월에 착즙해 탱크에 들어간 즙이 발효되면서 효모가 엄청나게 나오기 시작…
어느 날 메일 한 통이 왔다. 농업에 관심이 많으며 레돔 씨의 농법을 배우고 싶으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일머리는 없지만 끈기 하나는 자신 있다’는 자기소개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메일을 받고도 바빠서 잊어버렸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한번 보자고 하고는 또 잊어버렸는데 또 연락이 왔…
뭔가를 정말 열심히 하고 참 잘하는데, 돈을 못 버는 친구들이 좀 있다. 사실 좀 많다. 1인 출판사 하는 친구도 이 부류다. 혼자서 열일한다. 인생의 반은 원하는 책 출판 보조금을 따기 위해 사업계획서를 쓰느라 밤을 새우며 살았다. 내고 싶은 책들이 나오지만 출판사는 20년 전이나 …
어떤 과일을 가장 좋아하세요? 묻는다면 나는 사과라고 대답한다. 어떤 디저트를 좋아하세요? 묻는다면 나는 사과파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내가 사과술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옛날부터 사과를 좋아했다. 왜 구약성서에서 사과를 금단의 열매로 취급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
밭에 뱀들이 자꾸 보였다. 무슨 불길한 징조인 건 아닌지, 겁을 먹고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겨울잠 들기 전에 영양분 축적을 위해 먹이 사냥을 나온 것이라고 했다. 독이 바짝 올라있으니 조심하라고들 했다. 동네 밭 여기저기에서 똬리를 틀고 머리를 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곧 추위가 닥친…
올겨울은 무척 추울 거라고 한다. 옛날에 그런 소리는 귓등까지 오지도 않았는데 요즘엔 덜컥 겁이 난다. 봄에 심은 어린 묘목들이 얼어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내년 봄에 나무 다 얼어 죽었다고 울어도 소용없으니 단속 잘해 두라고!” 레돔에게 단단히 일러둔다. 우리는 완전무장으로 겨울…
대형마트에 갔더니 레드와인 한 병이 3900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와인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저 가격이 가능할지 너무 궁금했다. 맛도 궁금했다. 그냥 버릴 생각으로 한 병을 사왔다. 뚜껑을 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원가 계산부터 해보았다. 원산지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 어디인지는 …
대출 관련 업무로 은행에 갔더니 “회사가 설립 후 지금까지 당기순이익이 전혀 나오지 않았네요” 한다. 나는 회사 대표지만 당기순이익이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어머, 진짜요?”라고 답하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왠지 학교에서 낙제점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살았는데 왜 당…
날이 서늘해지니까 괜히 기분이 설렌다. 아침이면 안개가 자욱하고 나뭇잎은 벌써 물들어 간다. 황혼은 어느 때보다 붉고 밤하늘의 달은 눈이 부시다. 붓꽃은 까만 씨앗을 수북하게 쏟아내고 장미꽃은 올해의 마지막 송이를 피워내느라 애를 쓴다. 눈이 가는 곳 어디라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너…
“바람이 부니 좀 살 것 같다. 태양이 얼굴을 내미니 이제 숨을 쉬겠네!”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밭에 사는 나무들이 하는 말이다. 그 여름 동안 정말 힘들었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가끔 듣던 말 ‘삼 년 가뭄은 견뎌도 석 달 장마는 못 견딘다’는 말을 실감했다. 가뭄도 고통스럽긴 하지…
올해는 참 어렵다. 포도나무를 심기 위해 맨땅에 1500개의 구멍을 낼 때 알아봐야 했다. 어린 나무가 땅에 정착하는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과일이 즙이 되고 그 즙이 와인이 되는 데도 인내와 정성을 요구한다. 2020년, 올해 와인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와인병에 2020이 …
폭우가 쏟아지는데 친구 포도밭에서 전화가 왔다. 포도나무가 물을 너무 많이 먹어 포도송이가 터지고 있으니 어서 수확해 가라는 것이었다. 비상깜빡이를 켜고 기다시피 갔더니 농사지은 친구가 한숨을 푹푹 쉬고 있다. 그 옆에는 택배를 위한 빈 박스가 가득 쌓여 있다. 원래는 주문받은 포도를…
여름이 깊어가니 농부가 하는 이야기가 귓등으로 들린다. 맨날 일 이야기, 밭 이야기뿐이다. ‘아아, 나무 이야기 벌레 이야기 정말 듣기 싫다! 제발 다른 이야기를 좀 해봐!’ 나는 그렇게 외치고 싶지만 멍하니 듣는 시늉을 한다. 내가 아니면 누구한테 이야기하겠는가 싶어서 참는다. 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