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1년에 몇 번 만드세요? 한 달에 몇 병씩 만드세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일주는 1년에 한 번 만든다. 수확하는 그때를 놓치면 술을 담글 수 없다. 껍질에 붙은 효모로 발효하는 술은 과일 자체의 신선함이 중요하다. 야생 효모는 갓 수확했을 때 가장 많이 붙어있…
눈이 오고 다음 날 물이 얼었다. 땅도 얼었다. 12월이다. 이제 땅은 인간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로소 농부도 일에서 풀려났다. 아이고 겨울 아저씨, 감사합니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쉬지 않고 돌아가던 밭일에서 벗어나 따뜻한 아랫목에서 뒹굴며 게으름을 부릴 수 있게 …
가로수 잎들이 떨어지는 계절, 레돔은 낙엽을 쓸어 담아 포대 가득 넣는 사람들을 한참 바라보더니 저것을 좀 얻을 수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한다. 아, 다 가져가세요! 아저씨들의 흔쾌한 허락에 레돔은 낙엽 포대를 트럭 가득 실어 밭을 향해 날아가듯 달려간다. “저 나무들에게는 정말…
“아, 맛있는 냄새가 나요.” 빨간 장화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이렇게 말한다. 매주 이틀씩 양조장 일을 도와주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오는 미래의 와인 메이커 청년이다. 올 때마다 빨간 장화를 신고 일하기 때문에 그를 보면 모두가 “그 빨간 장화 총각?” 하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빨…
어, 산이 언제 저렇게 물들어버렸지? 관리기(소형 농기계의 일종)를 몰고 다니며 땅을 일구던 농부가 먼 산을 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린다.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는데 허리를 펴보니 가을이 깊어 있다. 산 아래 들판에서는 벼를 털고, 이쪽저쪽에서 콩을 타작하고, 들깨를 털어 날리고 있…
밭을 사기까지 2년이 걸렸다. 그동안 구입한 밭에 임대인의 작약이 심어져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이윽고 작약을 모두 뽑았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부리나케 달려가니 텅 빈 땅이 우리를 맞이한다. 두근거리는 첫 만남이었다. 혹시나 올해도 작약을 뽑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마음 졸였…
태풍이 가고 나니 마당에 맑고 따스한 햇빛이 가득하다. 각시나방 애벌레는 거친 포도 잎을 밤새 갉아먹고 고인 물속에서 나온 개구리도 무엇을 잡아먹을까 긴 혓바닥을 날름댄다. 봄에 피었던 개망초 흰 꽃들이 한 번 더 피고 비바람을 이겨낸 열매들은 익어간다. 수확의 달이기도 하지만 땅이 …
지난여름 어디선가 수백 마리의 벌들이 날아와 우리 집 빈 벌통에 살기 시작했을 때 웬 굴러온 호박인가 싶어 좋아했다. 이제 맛있는 꿀을 잔뜩 먹게 됐구나! 그런데 그냥 김칫국물을 먼저 마신 격이었다. 사람들은 “벌을 키운다”고 말한다. 개나 고양이는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고 병원도 데리…
이웃이 복숭아를 몇 박스 들고 왔다. 멍들었거나 깨알 같은 작은 점이 찍혔거나 나무에 긁히거나 눌린 것들,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지난겨울 가지치기부터 시작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복숭아나무에 매달려 꽃을 따내고, 열매와 잎을 솎아내고, 한 가지에 오직 한 개의 복숭아만 달아…
농부가 여름에 한 달 밭을 비우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온 들판이 전설의 고향 세트장으로 변할 것이다. 우리가 여름에 프랑스 시댁으로 간 것은 와인 병입을 모두 끝냈기 때문이었다. 포도가 익기 전인 7월 한 달만이 유일하게 시간을 낼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레돔은 가장 먼저 포도…
레돔의 친구 에두아르 이야기다. 레돔의 나이는 마흔, 에두아르는 마흔다섯, 두 사람은 늦은 나이에 농업학교에서 만났다. 원래 그는 아프리카에 와인 수출하는 일을 했는데 뒤늦게 농부가 됐다. 노르망디가 고향인 그는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고 노르망디 지역의 이름을 건 와인 만들기를 꿈꿨다.…
프랑스 알자스 시댁에 왔다. 한국에 산 지 거의 3년 만이다. 그동안 집에 가서 식구들 보고 오라고 말했지만 레돔은 거절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고향 음식이 먹고 싶지 않느냐고, 프랑스어로 수다 떨고 싶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다고 했다. 좀 이상한 남…
“저는 이제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정도 됐습니다. 이때를 ‘마의 3년’이라고 한다던데 생각해보니 저도 3년 차 죽음의 계곡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힘듭니다. 선생님도 사업하는 중에 죽음의 계곡에 들어간 적이 있는지, 그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것은 며칠…
이웃 밭에서 땅갈이를 하고 있다. 뭔가를 심을 모양이다. 제초제를 뿌려 잡초를 말린 다음 땅을 갈아엎고 있다. 기계로 세 번을 왔다 갔다 하니 노란 흙이 드러나고 안방처럼 깨끗해졌다. 뒤이어 다른 기계가 빠르게 골을 파고 검정 비닐을 덮는다. 이제 비닐에 구멍을 뚫어 씨앗을 넣으면 된…
“버섯이랑 신선한 크림을 잔뜩 넣어서 조린 송아지 갈빗살, 이건 큰누나가 제일 잘해. 훈제한 돼지 넓적다리 푹 삶은 것에 여름감자튀김, 포도나무에 구운 어린 양고기에 해콩 삶은 것도 괜찮지. 작은누나가 한 쿠스쿠스는 또 어떻고. 모로코 사람보다 매운 소스를 더 잘해. 디저트는 슈납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