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자란 종증조부님은 이재에 밝으셨다. 원산 등의 항구로 가서 명태를 사 부산에서 비싸게 파는 중개무역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다. 1900년을 전후한 개항기라서 명태의 운반에는 선박을 이용했다. 살기가 어려웠던 조부님도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에 성공했다. 조부님이 1945년 귀국하…
해양대를 졸업하면 3등 항해사가 되고, 2년 승선 근무를 마치면 2등 항해사로 진급한다. 그런데 1년 만에 초특급 승진한 동기생도 있다. 그 비결은 무얼까? 유조선이 한국에 입항하기 전 부두가 준비되지 않으면 회사는 기관감속(slow steaming)을 지시한다. 속력을 낮춰서 오…
외항 상선은 국제무역에 종사하기 때문에 국제통용어인 영어를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년 배를 타면서 영어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영어 공부는 해양대 재학 때부터 시작되었다. 학교에 ‘타임반’이 있었고 회화를 하는 반이 있었다. 나는 외교관이 될 꿈도 있었기에 고등학교 때…
선원 생활 중 가장 기다려지는 것이 교대의 순간이다. 1980년대 송출을 나간 선원들은 10개월을 승선해야 휴가가 주어졌다. 외국 선주가 운항하는 선박이라 한국에 기항하지 않는 송출선의 경우 교대 대상자는 외국 항구로 가서 전임자와 교대했다.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환승을 많이 했…
물밑에 내려진 그물을 끌며 고기를 잡는 트롤 어법과 달리 어망을 고정시킨 채 고기를 잡는 방법이 있다. 소위 ‘정치망(定置網) 어법’은 마을 앞바다 일정한 구획에 그물을 위아래로 쳐서 지나가는 고기들을 잡는 방법인데, 시나 군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동해안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일련의…
인류가 바다를 이용한 이래 바다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바다 말들이 육지에 올라와 일상생활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게 된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단어가 파일럿(pilot)이다. 선박 운항 중 가장 위험한 시점은 입·출항할 때다. 항구는 좁고 얕다. 입·출항하…
그 이유를 모르겠다. 배를 오래 타다 보면 바보가 되는가 보다. 1980년대 필자가 승선하던 시절, 바다 위이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는 실수가 드물기는 하지만 일어났다. 하루는 갑판수(목수)에게 행사에 쓸 12인용 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작업장에 가보니 열심히 제작 중이어서 마…
선박에 부속하는 물건 중 닻만큼 신기한 기능을 가진 것도 없다. 무게는 10t 남짓. 이것이 바다에 놓이면 10만 t 배도 제자리에 선다. 닻을 놓으면 닻을 축으로, 닻줄을 반경으로 선박이 조류와 바람에 따라 회전한다. 닻은 갈고리처럼 생긴 날개를 가진다. 이 날개가 바닷속 펄에 박히…
망망대해를 지루하게 가야 하는 원양 항해. 이 여정에서 항해의 즐거움을 좌우하는 게 요리장의 손맛이다. 야무진 손맛의 요리장은 선원들을 파라다이스로 이끄는 등대지만 반대의 경우는 ‘지옥’으로 이끈다. 음식이 맛있으면 웬만한 불편함은 잊고 지낸다. 하지만 시원찮으면 분위기가 흉흉해진다.…
롤링과 피칭, 이 단어들을 빼놓고는 승선생활을 말할 수 없다. 태풍이 지나가면서 만드는 파도의 길이는 300m 정도. 파도가 높은 정점에 이르렀다가 다시 정점이 찾아오는데 그 두 지점의 길이가 파도의 길이, 즉 파장이다. 이 같은 파장 속에서 내가 승선한 길이 150m의 선박도 마…
나의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20년 동안 일군 운수업을 정리하고 1945년 귀국길에 올랐다. 현금을 갖고 귀국하지 못하니 어선을 한 척 사 왔다. 그러고는 본가에서 10리 떨어진 축산항에서 수산업을 시작했고, 성공해 대형 어선 3척(삼화호, 삼중호, 삼광호)을 거느린 선주가 됐다.…
원양상선이 부산항을 출항해 미국 서부에 닿기까지는 약 보름이 필요하다. 항해 중 선교 당직은 1등, 2등, 3등 항해사와 당직타수 3명이 세 팀을 이뤄 한 번에 4시간씩 2교대로 이루어진다. 선박이 정한 항로를 따라 잘 항해하는지 확인하고, 접근하는 다른 선박과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 …
상선은 국적선과 송출선으로 나뉜다. 국적선은 한국 선주가 운항하는 선박이라 한국 항구를 모항(母港)으로 하므로 매달 한 번은 우리나라에 기항한다. 송출선은 외국 선주가 운항하는 선박이라 한국에 기항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1980년 후반에는 당시 승선계약에 따라 최소 10개월은 승선…
태풍이 불면 배는 늘 뒤쪽에서 바람을 받으며 항해해야 한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한국으로 항해할 때의 일이다. 북태평양 인근에서 시계 방향으로 거센 태풍이 불었다. 우리 배도 태풍을 뒤에서 받으며 뱃머리를 한국 방향에서 북쪽으로, 미국 쪽으로, 다시 한국 쪽으로 돌려가며 항해해…
1982년 첫 배를 탔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얀부와 라스타누라를 왕복하는 배였다. 고국 소식이 너무도 궁금하던 차에 외국 방송 듣는 법을 알게 됐다. 통신국장이 나를 부르더니 통신실에서 단파방송을 들려줬다. 잡음 탓에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었다. 영어 방송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