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숙모가 돌아가셨다. 당뇨 합병증이 심해지면서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외숙모를 곁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외숙모 가족의 마음고생도 헤아리기 힘들다. 그게 벌써 한 달 전 일이고, 코로나19가 전국으로 확산될 무렵이었다. 그 무렵부터 외숙모 같은 중환자는 격리돼…
여덟 살 여름 무렵이었다. 그 무렵 살던 동네에 집중호우로 낙동강이 범람하면서 홍수가 났다. 저지대 주택 단지는 어른 무릎 높이까지 물에 잠겼다. 그 단지에 세 들어 살던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른들은 쓰레받기와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그나마 멀쩡한 살림살이를 구해내느라 정신없이…
대구경북에 코로나19 감염자가 속출하면서 부모님이 계신 경북 왜관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게다가 어머니는 몇 주 전부터 인후통을 동반한 감기 증상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걱정할까 봐 그 사실을 최근까지 숨겼고, 나는 어머니한테 얼른 검사부터 받아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어머니…
얼마 전까지 머리가 어깨에 닿을 만큼 길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 기르는 까닭을 물었다. 머리를 기른 게 아니라 한동안 이발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대답을 수차례 반복하다 나중에는 아예 목에 팻말을 걸고 다닐까 궁리하기도 했다. 가령 이런 식의 팻말. ‘제 머리요? 그냥 기른 거임!…
산책길에 한 아파트 단지 앞을 지날 때였다. 단지 내에는 ‘어린이 승강장’이라고 적힌, 버스 정류장처럼 꾸민 간이 부스가 마련돼 있었다. 그런데 어린이 승강장에 어린이는 없고 할머니 네 분이 나란히 앉아 계셨다. 그 무렵이 오후 4시쯤이었으니까 할머니들은 어린이집 다니는 손주들의 하원…
원고 마감이 겹쳐 송년회 술자리 참석이 불투명해졌지만, 나는 계획이 다 있었다. 게다가 하필 이 시국에 모처럼 대청소하기로 했지만, 계획이 다 있었다. 등교하는 아이의 아침을 챙기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해치운다. 부리나케 청소기를 돌린 다음 뒷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나는 점심시간 전…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주변은 ‘논현동 먹자골목’이라고 서울에서 손꼽히는 유흥가다. 놀이터나 학원보다 유흥업소가 훨씬 많고, 학교 주변은 그 유흥업소를 찾는 어른들의 차량과 꽉 막히는 대로를 우회하려는 차량으로 늘 혼잡한 편이다. 늘 혼잡해서 그런지 과속방지턱은커녕 차량을 통제하는 신…
학부모 여러분, 모두 하고 계십니까? 하고 계시다면 어디까지 해보셨습니까? 자녀 성(性)교육 말입니다. 저는 사실 우리나라 공교육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제 학창 시절과 달리 성교육 정도는 학교에서 어련히 알아서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에게 느닷없이…
지난겨울 아내의 만화책 ‘두 여자 이야기’ 프랑스어판이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 공식 경쟁 부문에 올랐다. 그 덕분에 우리 집 세 식구는 예정에 없던 여행을 하게 됐다. 앙굴렘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442km 떨어진 작은 성곽도시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상점과 식당은…
“가을 수련회 취소됐대.” 우리 집 초딩이 가방을 팽개치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1박 2일로 예정된 수련회가 갑자기 당일치기 현장학습으로 바뀌었다나 뭐라나. 몇 달 전 우리 초딩은 그 어느 때보다 설레는 표정으로 가정통신문 한 통을 건넸다. 그동안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나눠주는 …
아무 영화나 한 편 보다 잘까 했다. 그런데 TV 리모컨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채널을 바꿀 수도, 음량을 조절할 수도 없었다. 화면을 송출하는 셋톱박스에는 전원 버튼밖에 없었다. TV는 오로지 리모컨으로만 통제할 수 있었고, 하필 음소거 상태였다. 마침 화면 속 홈쇼핑 호스트들…
처가댁 다녀오는 길이었다. 모처럼 낮술도 한잔했고, 우리 집 세 식구는 지하철 대신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정거장에는 모범택시 한 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일반택시 잡아타려고 못 본 척 지나쳤다. 그런데 등 뒤에서 경적이 세차게 울렸다. 모범택시 기사는 차창을 내려 손짓까지 하…
동네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손님이 수입 맥주를 계산하면서 목청껏 말했다. “이거 일본 맥주 아니죠?” 자신의 애국심을 알아주길 바란 듯했다. 그 동네 편의점에는 일본인 점원도 있다. 만일 그 손님이 일본인 점원이 근무하는 시간대에 찾아와서 그랬다면 어땠을까. 며칠 전 아…
아내가 홀연히 캐나다로 떠났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캐나다에서 보냈던 아내는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만화로 만들던 중이었다. 나는 초안을 읽자마자 지금까지 이런 만화는 없었다며 있는 힘껏 아내의 차기작을 칭송했다. 꼭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초안만으로도 그동안 아내 …
아이는 내가 자기를 호되게 꾸짖은 순간을 일일이 기억한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여섯 살 때 아빠가 나 무릎 꿇리고 무거운 책 들게 했잖아.” “일곱 살 때 아빠가 내 손바닥을 플라스틱 자로 때렸잖아.” 하필 이런 얘기는 자기를 최고로 아끼는 할머니 앞에서만 기다렸다는 듯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