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왕으로 문무왕을 지목하지만, 그의 아들 신문왕의 역할도 간과할 수는 없다. 신문왕은 민심을 수습하고 새로운 나라로 나아가기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는 681년 즉위 후 선왕의 장례를 채 마치기도 전에 위기를 맞았다. 장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킨…
1624년 정월, 평안병사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 정예병 1만의 반란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조선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인조는 급기야 몽진을 결정했다. 설왕설래 끝에 차령 이남의 공주가 피란처로 결정됐다. 가슴 졸이며 공주에 도착한 왕은 감영이 아닌 공산성에 머물기로 했다. 혹 생…
고려 고종 때인 1238년 몽골군은 경주에 다다라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했다. 그들의 약탈에서 사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룡사에 난입한 몽골군은 곳곳을 헤집고 급기야 불까지 질렀다. 무자비한 화마는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 두 가지에 해당하는 장육존상과 9층탑을 집어삼켰다. 수백 년…
가야는 한 나라로 통일되지 못하고 느슨한 연맹을 이뤘다. 가야연맹은 신라, 백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활동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가야연맹을 구성한 나라가 몇이었는지, 그 나라들의 정확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가야사에 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하기 …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에는 철의 수요가 많았다. 각국은 최대한으로 철을 확보해 병장기와 갑옷을 만들어야 했고, 부족할 경우 농기구를 녹여 충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철의 안정적 확보는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신라는 일찍이 제철 기술을 확보해 철광을 개발하고 철을 …
지난해 4월 문화재청은 백제 금동신발 두 켤레를 보물로 지정했다. 그간 발굴된 수십 점의 금동신발 가운데 명품 반열에 오른 첫 사례였다. 다른 금동신발에 비해 보존 상태가 좋고 정교한 무늬까지 갖춰 보물로 지정됐다고 한다. 금동신발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매우 특징적 유물이다. 세계 각…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역대 왕은 56명이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경주 곳곳의 거대 무덤에 묻혔겠지만 어느 무덤이 누구의 능인지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조선 후기에 박·석·김씨 문중이 간략한 옛 기록에 근거해 왕릉으로 비정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릉원 일대에 즐비한 무…
장수왕은 서기 427년 왕권을 강화하고 고구려의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며 평양천도를 단행했다. 학계에선 평양천도의 이유 가운데 하나로 남진(南進)을 지목한다. 장수왕은 서북방 선비족 왕조들과의 대결에 신경을 쓰면서 긴 호흡으로 남진을 준비했고 기회를 엿보다가 단 일격에 목표를 이뤘다. …
사비기(538∼660) 백제왕들 가운데 성왕, 무왕, 의자왕은 잘 알려져 있다. 성왕은 영웅군주로, 무왕은 선화공주와의 러브스토리로, 의자왕은 백제를 패망으로 이끈 인물로 유명하다. 그에 비해 창왕(위덕왕), 혜왕, 법왕은 생소하다. 혜왕과 법왕은 재위기간이 워낙 짧아 그렇다 하더라도…
북쪽에서 시작한 철기문화는 기원 전후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도 꽃을 피운다. 농업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됐고 크고 작은 정치체들이 등장했다. 3세기 무렵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나라들이 바로 그 계승자다. 중국 역사책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에 54국, …
가야는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채 크고 작은 여러 나라가 분립하다가 신라에 차례로 복속됐다. 서기 4세기까지는 금관가야가, 5세기 이후에는 대가야가 가야 연맹을 이끌었다. 이 가운데 금관가야에 관한 연구는 워낙 미진해 이 나라가 언제 세워졌고 또 언제 멸망했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
요즘 용왕이라 하면 민간신앙의 대상 정도로 여겨지지만 고대사회에선 국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강고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용이 바다와 못, 심지어 우물 속에도 있다고 여겨 그곳에 제물을 바치고 소원을 빌었다. 신라 문무왕이 죽음을 앞두고 사후에 …
신라 고분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쏟아진다.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등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는 수만 점씩의 유물이 출토되므로 그것을 제대로 정리해 내는 데 수십 년도 부족할 지경이다. 그러나 신라 고분에서는 고구려의 벽화나 백제의 묘지석처럼 무덤 주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유물이 많지 않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박혁거세가 기원전 57년에 신라를 건국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불신하고 신라가 4세기 이후 세워졌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고려 삼국사기보다는 3세기 중엽 찬술된 중국 사서 삼국지 동이전을 더 신뢰한다. 같은 시대를 두고 두 사서는 신라의…
서울은 수백 년간 백제의 왕도였지만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백제 유적 다수가 사라졌다. 지금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일부만 남아 있다. 그간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실시했지만 최고급 물품의 출토 사례는 극히 적다. 다만 백제왕이 지방 유력자들에게 준 물품들이 여러 유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