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소리 내지 않기. (…) 소리 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한 방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정희(1947∼)가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 문장을 쓰는 소설가 중 한 명이라는 데 이견을 낼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유년을 그린…
연이은 폭염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두의 건강과 안녕이 걱정되는 차에 자꾸 떠오르는 영화 속 장면이 있다. 여자 주인공이 눈 쌓인 벌판을 헤치듯 걸어 나가 먼 산을 향해 “오겐키데스카? 와타시와 겐키데스(잘 지내나요? 난 잘 지냅니다)”라고 외치는 모습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
위대한 예술가는 조화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이를 뛰어넘는다. 고전주의 시대 위대한 예술가들도 형식을 따르는 것과 함께 자유를 추구했다. 인간은 모두 이성을 지녔고 이에 따라 자신의 삶을 개척할 자유가 있다는 게 계몽주의의 가르침이었다. 여기서 예술의 형식이란 이성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더럽고 끈적한 심리를 구석구석 파고드는 소설가로 여겨진다. 그러나 내게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섬세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소설가로 각인되어 있다. ‘백치’(김근식 옮김·열린책들·2009년)를 읽은 이후부터다. 작가가 “이 소설의 주요한 의도는 아름다운 사람을 긍정적…
1929년 미국 금주법 시대 시카고에서 빈털터리 색소폰 연주자 조(토니 커티스)와 베이스 연주자 제리(잭 레먼)는 우연히 밀주업자 갱단의 살해 장면을 목격한다. 숨어서 보다가 들통 난 두 사람은 도망치던 중 여성 순회악단에 들어가게 된다. 여장을 하고서 말이다. 두 사람은 악단의 매력…
탱고 하면 정열을 떠올리는 이가 많지만, 외로움을 모르고서는 탱고를 알 길이 없다. 긴 외로움의 시간을 모아 짧은 정열의 순간으로 바꿔낸 것이 탱고다. 외로움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모르는 타인이라도 좋으니 사람의 온기를 잠시나마 가까이…
읽기 위해 특별한 시공간을 요구하는 소설이 있다. 고요하든 시끄럽든 그 소설에 가장 알맞은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비로소 그 소설과 만나는 통로에 이른다. 어떤 소설은 주어진 언어를 선물하지만, 어떤 소설은 내 안의 언어를 발굴하게 하기 때문일까. 브라질 여성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1…
20년 넘게 수많은 시사회를 다녔지만 유독 잊을 수 없는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다. 시사회에서는 보통 영화 본편이 끝나고 엔딩크레디트가 뜨기 무섭게 상영관을 바삐 퇴장하는 사람들, 개념 없이 좌석 앞에 서서 남의 시야를 가리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2006년 국내 개봉한 …
3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던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궁정악장 자리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이 벌써 여러 번 바흐의 이직을 막아가며 바이마르에 붙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리는 전임자의 아들 차지가 되고 말았다. 바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바흐는 …
“SF가 흑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한때는 ‘유일한’ 흑인 여성 SF 작가였던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가 대중 강연에서 가장 자주 들었던 질문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독보적인 대가로 기억되지만, 당시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이었던 미국 SF계에서 버틀러는 자신의 작업과 …
엔니오 모리코네 작곡의 오리지널 주제가만 들어도 세피아 톤의 향수에 젖어 들게 하는 추억의 명화가 있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시네마 천국’(1988년·사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에 사는 똘똘하고 장난기 많은 꼬맹이 토토는 동…
올해는 생상스 서거 100주년이다. 어린 시절 명상 시간에 늘 나오던 ‘동물의 사육제’의 ‘백조’나 김연아 선수의 쇼트 프로그램에 함께 흐르던 ‘죽음의 무도’가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두 개의 히트곡’이 생상스의 전부일까. 그의 진정한 업적은 무엇일까. 생상스는 혜성과 같이 프랑…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존 쿠체의 소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들녘·왕은철 옮김·2005년)의 주인공인 호주의 저명한 60대 여성 소설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녀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리얼리즘, 동물, 인간, 채식, 악, 신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로 …
잔학무도한 마적단 두목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름 정직한’ 2인조 무장강도를 섭외한다는 것이 라메시 시피 감독의 인도 영화 ‘화염(Sholay·1975년)’의 이야기다. 이 두 무법자가 믿을 만하다는 것, 용감무쌍하고 수완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외진 마을의 유지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사람의 얼굴에다 그렸다. 모두가 바깥 환경을 묘사할 때, 자연이 인간의 내면에도 깃든다는 단순한 진실을 재치 있게 포착해낸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인간은 자연을 소재 삼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