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이재영 옮김·창비·2011년)는 단 네 권의 소설로 위대한 현대 독일문학의 반열에 오른 W G 제발트의 세 번째 소설이다. 1992년 어느 여름, 고대 왕국의 터였던 영국 동남부 지방을 도보 여행한 사람의 사색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나’의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문…
하루에 한 번, 편의점에 가서 유통기한이 1994년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찾아 모으는 남자가 있다.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4월 1일 만우절에 헤어지자고 해서 농담이 한 달만 가길 바라며, 농담이 아니었다면 본인의 생일인 5월 1일 그 통조림을 모조리 다 먹고 그녀를 …
베토벤의 교향곡 아홉 개 가운데 봄에 가장 어울리는 것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4번을 택한다. 따뜻하고, 밝고, 약동하는 교향곡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은 더 유명한 3번 ‘영웅’과 5번 ‘운명’ 사이에 끼어 있어 찾는 이도 적은 편이다. 그러나 이 곡이 없었더라면 베토벤 교향…
나쓰메 소세키(1867∼1916)라고 하면 20세기 초반 근대문학의 태동기에 근대적인 인간을 문학적으로 그려낸 대표적인 소설가로 평가받지만, 이 글에서는 조금 사소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바로 눈앞에 있는 문을 열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 관해서 말이다. ‘산시로’ ‘그 …
몇 년 전 ‘포켓몬 Go’라는 위치 기반 증강현실 게임이 한창 유행할 때였다. 국내에서 개최된 한 국제영화제에 온 미국인이 비무장지대(DMZ) 내 판문점에서 포켓몬이 발견됐다며 포켓몬을 잡으려 DMZ 투어를 신청했다고 신나서 자랑하던 게 생각난다. ‘그래, 우리 민족의 분단 현실이 제…
시원한 파바로티의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모 기업의 기발한 광고 덕분일까.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여자의 마음’은 취향을 떠나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오페라 아리아가 되었다. 우리말로 번안해 불러도 어색함이 없는 선명한 선율, 상쾌하고 흥겨운 삼박자의 리듬은 듣는 이를…
“음악 때문이었어.” 1917년 7월 1000여 명의 흑인이 인종차별에 항의해 미국 뉴욕의 맨해튼까지 걸어갔던 ‘침묵의 행진’을 떠올리며 한 여자는 말한다. 이스트세인트루이스에서 벌어진 백인들의 폭동으로 수백 명의 흑인이 사망한 직후였다. 이 모든 끔찍한 폭동과 시위가 일어난 까닭이 …
얼마 전 캐나다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별세했을 때, 그가 주연한 1965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다시 찾아보게 됐다.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활약하던 플러머는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에 참가하면서 ‘폰 트랩 대령’ 역할에 깊이와…
강렬한 셋잇단음표의 연타! 폭주하는 말발굽 소리가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 한번 들으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독일 가곡 최고의 히트작은 불과 열일곱 청소년의 손에서 나왔다. 소년은 키 작은 안경잡이였지만 가슴속만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샘솟는 악흥을 길어내는 대신 교…
‘등대로’(1927년)는 버지니아 울프가 45세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1909년부터 1919년까지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군도에 있는 별장에서 램지 부부, 여덟 명의 자녀 및 별장에 초대된 손님들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등대로’는 줄거리 요약으로 포착하려 하면 지나치게 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