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전쟁의 북소리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몸은 앙상했지만 칠판에 덧셈과 뺄셈을 쓰기 위해 분필을 쥔 손은 커다랬다. 우리는 모두 그가 특별하다고 생각했고 그를 부러워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유일한 남자 교사였고, 2학년이었던 나의 담임이었다. 그의 옆에 있으면 남자가 되는…
지난 몇 년 동안 사진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꽤 오랫동안 사진집을 모았고 지금은 거의 3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 사진작가들 것도 적지 않은데 나는 여전히 멋진 한국 사진작가들을 찾고 있다. 나의 아버지도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 가족 여행 외엔 따로 사진을 …
2011년, 아내와 콜롬비아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왔을 때 6개월 동안 부산에서 살았다. 부산의 한 독서실, 그러니까 수험생들이 매일 방과 후에 수능을 준비하기 위해 공부하는 그 시설에서 두 번째 소설을 완성했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칸막이 책상에 엎드려서 잠을 자는 …
마흔이 되기 전까지 나는 식물에 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아마 계절이 없어 1년 내내 어딜 가도 푸른 식물을 볼 수 있던 콜롬비아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동네 꽃집이나 주변 시장에서 조금씩 화분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심지어 화훼시장에도 몇 번 들러 화분을 샀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주말 활동이 뭐냐고 묻는다면 가장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어볼 수 있겠다. 등산과 시위. 시위하기 위해 거리와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물론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2주 전 콜롬비아에서도 현 대통령인 구스타보 페트로에 반대하는 시위와 행진이…
이번 주말에 한국과 일본의 복잡한 관계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경험이 세 번 있었다. 먼저, 입소문을 듣고 본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다. 포스터도 그렇고 주인공 중 한 명이 배우 최민식이라서 스릴러 영화가 아닐까, 짐작했을 뿐 내용에 관해서는 사전 지식이 별로 없었다. 얼마…
인천공항에 착륙할 때마다 창밖으로 우뚝 솟은 빌딩들을 바라보곤 한다. 도시 한가운데 조성된 콘크리트 숲 같다. 건물들은 비슷비슷한 외형에 높이나 색마저 서로 다르지 않다. 한국을 방문했던 한 친구는 벌집 같다고도 말했다. 또 다른 친구는 거꾸로 땅에 묻힌 거대한 로봇 다리들 같다고 했…
콜롬비아를 방문할 때면 대부분 시간을 아버지의 커피농장에서 보낸다. 보고타에 사시던 아버지는 20여 년 전 어머니와 헤어진 후로 그곳에서 혼자 살고 계신다. 해발 1200∼1500m 산 중턱에 있는 이곳은 1월에도 기온이 섭씨 25도까지 올라가며 1년 내내 한국 5월의 날씨와 비슷한 …
올해 3월, 199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세상을 떠났다. 예전 그의 인터뷰를 읽다가 익숙한 문장을 발견했다. “매일 아침 나는 항상 읽을 책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깬다.” 영화, 노래, 그림, 그리고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삶…
내 나이 스무 살 때 처음으로 미국 뉴욕에 발을 디뎠다. 어학연수를 하기 위해 머물던 뉴저지의 이모댁에서 매일 버스를 타고 뉴욕 시내에 내리곤 했다. 신호등이 나타날 때마다 푸른색으로 바뀔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사람들 틈에 밀리면서 길을 건넜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서퍼들과 배우 지…
얼마 전, 누군가가 나에게 취미가 있냐고 물었다. 독서가 취미라고 말하려다가 멈추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겐 독서라는 게 취미가 될 수 있을지언정 나에게는 아니기 때문이다. 독서는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에게 취미라면 ‘걷기’다. 남산의 산책로를 아무 …
내가 나고 자란 도시 보고타는 추운 곳이다. 콜롬비아는 한국과 달리 사계절이 없다. 기후는 해발 고도에 따라 달라진다. 고도가 낮을수록 따뜻하고 높을수록 춥다. 보고타라는 도시는 해발 2600m에 자리 잡은 분지여서 기온은 1년 내내 섭씨 7도에서 19도를 오간다. 적도에 위치한 콜롬…
머리가 벗겨지고 있다.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내게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올해로 75세가 되시지만 머리카락은 여전히 빽빽하다. 30년 전에 항암치료를 받으셨을 때도 머리카락은 그대로였다. 내 머리가 점…
최근, 수십 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책을 읽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은 ‘전쟁’이며 저자는 루이페르디낭 셀린이다. 더 일찍 출판되지 않은 이유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지면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어쨌든 ‘전쟁’을 읽고 나…
일주일 전, 콜롬비아의 한 영화감독이 전주 영화제에서 신작을 선보였다. 지인이기도 한 그는 전주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며칠 서울에서 머물며 다음 작품의 촬영지를 물색했다. 나는 그 감독과 함께 을지로와 용산, 강남, 종로 등 서울의 여러 동네를 함께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맥주를 마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