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4명의 기자가 돌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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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L은 여자 아이돌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장원영의 비율과 곡선을 쏙 빼닮았었다. 심지어 음악을 좋아하고 춤도 꽤 잘 춰서 MT를 가면 늘 원더걸스나 소녀시대의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드는 L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마…
버스 종점을 한 번 지나, 앞뒤로 나란히 걸린 ‘안녕히 가십시오 은평구입니다’와 ‘세계 속의 경기도’ 간판도 지나, 지금은 이름이 바뀐 전투경찰대 건너 일렬로 펄럭이는 새마을 깃발까지 지나면 어김없이 그 육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왕복 4차로 위에 턱 하니 놓인 거대한 콘크리트 덩…
영화 퍼펙트 데이즈 속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의 공공화장실 청소부다. 그는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는 50대 남성이다. 출근 전 그는 신중하게 그날의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고른다. 스포티파이 같은 스트리밍 앱이 아닌 카세트테이프로 말이다. 우연히 차를 타게 된 젊은 20대 남자 후배와 그…
장롱면허에서 탈출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운전대를 잡는 상상만 해도 마음이 졸아들곤 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멀리 떠나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악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거나 옆차선 넘지 않고 우회전, 좌회전 하는 것은 웬만큼 익숙해졌다. 하지만 옆에서 끼어드는 차들에 마음 졸…
H와 알고 지내게 된 건 고3때였다. 건너건너 누군진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진 서로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어떤 분야에도 재능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H는 공부에 재능이 있는 친구였다. 모의고사건 내신이건 국어를 제외하곤 H가 미끄러진 과목이라야…
어린 시절,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에서 열리는 노벨상 기념 만찬을 보며 ‘나도 저 자리에 있고 싶다’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수상자들의 업적보다는 만찬 메뉴가 더 궁금했던,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마음이었지만. 내가 아닌 한강 작가가 그 꿈을 이룬 지금, …
우리같이 피가 모자란 사람들은 넘의 살을 먹어줘야 해, 그녀는 말했다.그녀는 자신을 닮아 철분도 혈압도 정상치에 못 미쳤던 어린 나를 위해 부지런히 푸줏간을 드나들었다. 네 나이 때 나도 현기증 때문에 아침에 머리를 못 들어서 학교도 못 간 날이 허다했는데, 어쩜 너도 똑같니. 그녀는…
지난달 초 오랜만에 대학 동기 A를 만났다. 둘이 식사한 적은 별로 없는 친구였다. 약속에 조금 늦은 내게 A는 진지한 표정을 하곤 메뉴판을 들이밀었다.“넌 먹는 데 진심이야?”당황스러운 질문. 네가 뭘 제대로 먹기는 해? 시원찮은 반응에도 친구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를 노려봤다. …
지난 주말 이불을 바꿨다. 이불 바꿔라, 철철이 공기가 바뀌는가 싶으면 계절보다도 먼저 찾아오는 엄마의 레퍼토리. ‘아직 괜찮다’며 두세 번 잔소리가 되고야 움직이곤 했는데 올해는 냉큼 바꿨다. 새하얀 냉감 소재 여름 이불을 못 해도 석 달은 쓴 것 같다. 중간에 한 번 빨았어도 누레…
한해의 절반을 넘기면서부터 몇몇 선배와 동료들은 올해도 내가 체스 대회에 나가는지 궁금해했다. 지난해 여름 내가 체코에서 열린 체스 대회에 출전한 게 인상적이었는지 기억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물론 내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어릴 적 체스에 빠진 뒤로 ‘매년 국제 대회에 출전하겠…
화려한 기술이나 값비싼 장비 없는 손맛이 이겼다. 내로라하는 요리사 100명을 추려 그중에서도 1등을 꼽는 넷플릭스 요리 대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서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인 요리는 다름 아닌 급식이다. 15년간 경남 양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먹인 ‘급식 대가’ 이미영 씨가…
동네에서 엄하기로 소문난 여중에 다녔다. 두발 제한 교칙은 ‘귀밑 15cm’였지만 어깨에 머리카락이 닿는 날엔 여지없이 불호령이었다. 안 그래도 교복이 워낙 촌스러웠던 탓에 우리 학교 학생들의 별명은 ‘바둑판’이었다. 그 치마에 대고 바둑을 두어도 판정시비가 없을 정도로 체크무늬가 촘…
140 bpm.경기에 몰입하던 중 갑자기 지-잉 울리는 휴대전화. “움직임이 없는 휴식 상태에서 심박수가 10분 동안 120bpm 보다 높으니…” 나의 건강에 짤막하게 우려감을 드러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무호흡’ 상태로 눈만 이 스크린 저 스크린 데굴데굴 굴리는 중이었다. 경기…
‘따빠오(tapao, 포장)’는 우리가 싱가포르에 머문 8월 한 달 동안 의외로 가장 많이 썼던 단어 중 하나였다. 거의 날마다 따빠오를 하는 바람에 이 ‘미식(美食)의 나라’에서 외식할 기회가 없었을 정도로.시작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데라의 한마디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시아 14개국의…
그날 술을 좀 많이 마시긴 했지. 잠깐만 속이 비어도 위가 쓰리다 못해 울렁거렸다. 하루 이틀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참았는데 일주일이 가도록 영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주말에야 급하게 병원을 찾았다.토요일 오후. 근처에서 아직 진료 중인 곳은 소아청소년과 병원이었다. 흔히 말하는 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