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4명의 기자가 돌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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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그는 검찰총장 시절 유달리 사진 찍히기를 싫어했던 관료였다. 그는 취재진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대검찰청 정문 대신 매일 지하 주차장을 이용했고, 구내식당으로 이어지는 청사 구름다리 통로를 선팅으로 도배하게 했다.지난 20대 대선에서 국회 사진 기자로 만난 윤 총장은 이제 국…
주식 단타로 번 돈으로 결혼기념일에 비싼 식사를 했다. 주식 창이 빨갛게 물들면 섣불리 축배를 들었다가도, 파랗게 돌변한 코스피에 얼굴까지 새파랗게 질려버리는 나는 영락 없는 K-개미다. 주가 그래프처럼 요동치는 마음,깃털처럼 가벼운 손가락. 이렇게 충동에 약하고 본능에 충실할 수가 …
법이 상식을 앞설 때가 있다. 올봄 강원 고성을 여행할 때였다. 숙소가 해수욕장에 맞닿아있어 머리맡 발코니 창문을 열면 밤바다의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잘 수 있었다. 하루는 기분 좋게 잠을 청하려는데 난데없이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커튼을 젖혀보니 젊은 남녀 넷…
2004년 11월 12일. 임요환과 홍진호가 에버 2004 온게임넷 스타리그 4강전에서 맞붙었다. 올해 이달로 딱 20년이 됐다.임요환은 일꾼을 동원해 상대 앞마당에 벙커를 짓고 초반에 압박하는 전술, 벙커링을 통해 5판 3선승제 승부에서 필요한 승수를 내리 따내면서 결승에 오른다. …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L은 여자 아이돌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장원영의 비율과 곡선을 쏙 빼닮았었다. 심지어 음악을 좋아하고 춤도 꽤 잘 춰서 MT를 가면 늘 원더걸스나 소녀시대의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드는 L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마…
버스 종점을 한 번 지나, 앞뒤로 나란히 걸린 ‘안녕히 가십시오 은평구입니다’와 ‘세계 속의 경기도’ 간판도 지나, 지금은 이름이 바뀐 전투경찰대 건너 일렬로 펄럭이는 새마을 깃발까지 지나면 어김없이 그 육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왕복 4차로 위에 턱 하니 놓인 거대한 콘크리트 덩…
영화 퍼펙트 데이즈 속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의 공공화장실 청소부다. 그는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는 50대 남성이다. 출근 전 그는 신중하게 그날의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고른다. 스포티파이 같은 스트리밍 앱이 아닌 카세트테이프로 말이다. 우연히 차를 타게 된 젊은 20대 남자 후배와 그…
장롱면허에서 탈출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운전대를 잡는 상상만 해도 마음이 졸아들곤 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멀리 떠나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악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거나 옆차선 넘지 않고 우회전, 좌회전 하는 것은 웬만큼 익숙해졌다. 하지만 옆에서 끼어드는 차들에 마음 졸…
H와 알고 지내게 된 건 고3때였다. 건너건너 누군진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진 서로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어떤 분야에도 재능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H는 공부에 재능이 있는 친구였다. 모의고사건 내신이건 국어를 제외하곤 H가 미끄러진 과목이라야…
어린 시절,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에서 열리는 노벨상 기념 만찬을 보며 ‘나도 저 자리에 있고 싶다’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수상자들의 업적보다는 만찬 메뉴가 더 궁금했던,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마음이었지만. 내가 아닌 한강 작가가 그 꿈을 이룬 지금, …
우리같이 피가 모자란 사람들은 넘의 살을 먹어줘야 해, 그녀는 말했다.그녀는 자신을 닮아 철분도 혈압도 정상치에 못 미쳤던 어린 나를 위해 부지런히 푸줏간을 드나들었다. 네 나이 때 나도 현기증 때문에 아침에 머리를 못 들어서 학교도 못 간 날이 허다했는데, 어쩜 너도 똑같니. 그녀는…
지난달 초 오랜만에 대학 동기 A를 만났다. 둘이 식사한 적은 별로 없는 친구였다. 약속에 조금 늦은 내게 A는 진지한 표정을 하곤 메뉴판을 들이밀었다.“넌 먹는 데 진심이야?”당황스러운 질문. 네가 뭘 제대로 먹기는 해? 시원찮은 반응에도 친구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를 노려봤다. …
지난 주말 이불을 바꿨다. 이불 바꿔라, 철철이 공기가 바뀌는가 싶으면 계절보다도 먼저 찾아오는 엄마의 레퍼토리. ‘아직 괜찮다’며 두세 번 잔소리가 되고야 움직이곤 했는데 올해는 냉큼 바꿨다. 새하얀 냉감 소재 여름 이불을 못 해도 석 달은 쓴 것 같다. 중간에 한 번 빨았어도 누레…
한해의 절반을 넘기면서부터 몇몇 선배와 동료들은 올해도 내가 체스 대회에 나가는지 궁금해했다. 지난해 여름 내가 체코에서 열린 체스 대회에 출전한 게 인상적이었는지 기억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물론 내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어릴 적 체스에 빠진 뒤로 ‘매년 국제 대회에 출전하겠…
화려한 기술이나 값비싼 장비 없는 손맛이 이겼다. 내로라하는 요리사 100명을 추려 그중에서도 1등을 꼽는 넷플릭스 요리 대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서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인 요리는 다름 아닌 급식이다. 15년간 경남 양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먹인 ‘급식 대가’ 이미영 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