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4명의 기자가 돌아가며 씁니다.
기사 42
구독 57
요즘 사거리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릴 때면 주변에서 가장 크고 우람한 가로수를 찾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그늘 때문은 아니다. 저쪽 도로로부터 좌회전을 하는 차가, 이쪽 도로로부터 우회전하는 차가 언제 인도로 돌진할지 몰라서, 만약 그랬을 때 인도에 설치된 방호울타리도, 차량 진입…
지난 주말, 정오의 땡볕에 달궈진 철로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때였다. 비둘기 한 마리가 1호선 온수역 철로에 내려앉았다. 몇 걸음 안 가 비둘기는 철로와 승강장 틈새로 몸을 숨겼다. 50㎝도 채 돼 보이지 않는 틈에서 그늘을 찾은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양주행 열차가 들…
여름방학이면 방바닥에 철썩 눌어붙어 시간을 보내는 수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손님도 없는 집에 에어컨을 튼다는 건 당시의 엄마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덜 더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결국엔 방바닥 부침개였다. “가만히 있으면 안 더워.” 당신은 부지런…
“나 어떡하지? 요즘 행복하지가 않아”밤 9시에 동료인 그는 다짜고짜 전화로 행복을 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듣는 것뿐.사연은 이랬다. 정확히는, 사연이랄 것이 없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든 것이 괜찮았다. 쑥쑥 잘 크는 아이, 안정적인 직장, 심신의 건강, 별문제 없는 재정…
한민족은 도대체 어디까지 김치로 만들어 먹을 수 있을까. 몇해 전 소셜미디에서 화제가 된 ‘김치 게임’은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우선 김치로 만들어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야채(또는 과일까지)를 하나 상상한다. 그러곤 그 야채로 담근 김치가 있는지 검색한다. 그…
바깥은 한여름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늘했다. 가을쯤 이곳은 이미 겨울이라 옷을 단단히 입어야 한다고. 한참을 가로등 하나 없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도착한 곳이었다.(아, 달리지는 못했지.) 차 바퀴 아래 거친 돌들이 느껴지며 차체가 울퉁불퉁 튀었다. ‘이거 맞아?’ 불안해질 …
CD를 굽던 시절이 있었다. 토스터에 굽는 것도 아니요, 프라이팬에 볶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좋아해 줄 누군가를 생각하며, 한 곡 한 곡 노래를 내려받은 다음 한 사람만을 위한 CD를 만드는 일이다. 이 행위는 광학 저장매체인 CD에 레이저를 쏘아 표면을 ‘구워…
27년간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차한 최화정은 두 번째 주방으로 유튜브를 택했다. 영상 속 최화정은 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국수를 말아 먹는다. 화사한 스트라이프 셔츠 차림으로 묵은지를 볶는다. 이 채널은 방송인 홍진경을 ‘공부왕찐천재’로 리브랜딩한 유튜브 PD의 두 번째 히트작이…
생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죽음 앞에서야 새삼스레 생을 더듬어 보는 산 자들의 만용조차 너무나 죄스럽게 느껴진다. 세상 사람들은 정말이지 계속 죽는다. 젊은 채로, 행복 또는 불행의 한가운데서, 자식을 남기고, 부모를 뒤로하고 죽어버린다. 수습기자 때 참사 현장과 빈소를…
날이 더워지고 겉옷이 얇아지니 다시 트레이닝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헬스장을 검색했는데 마침 근처에 새로 생긴 곳이 있었다. 그 헬스장은 아파트 단지들 사이 익숙한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헬스장이 없어졌다 생기길 반복하는 곳이었다.헬스장 안내판에는 기본 12…
얼마 전 조용하던 가족 카톡방에 알림이 떴다. 엄마가 혼자서 갑자기 발끈하고 있었다.“방송에서 ‘~같아요’ 라는 말 좀 그만 듣고 싶다!” 뒤따라 이번엔 아빠가 갑자기 링크를 하나 보냈다. ‘한국 간판’으로 명성을 날리는 운동선수의 소식을 알리는 뉴스였다. 경기 영상 뒤 이어진 인터뷰…
지난달 27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걸그룹 뉴진스 팬 미팅 ‘2024 버니즈 캠프’에서 하니가 부른 ‘푸른 산호초’(青い珊瑚礁) 직캠 전주 부분을 유튜브에서 몇 번이나 되돌려봤는지 모른다. 그날 하니는 무대 위에서 영락없는 80년대 아이돌이다. 걸스 힙합은 잘 모르니 묻지 말라는 듯이…
지난주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혹시 짬 날 때 둘러볼 곳이 있을까 ‘자카르타 여행’을 검색해봤다. 여행지로서의 자카르타는 악평이 자자…아니 그냥 평이 없었다. 단어를 ‘여행’에서 ‘출장’으로 바꾸자 후기가 쏟아졌다. 최악의 교통체증 경험과 비즈니스호텔 숙박 …
*이 칼럼엔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퓨리오사는 미련하다. 어릴 적 젖과 꿀이 흐르는 ‘녹색의 땅’에서 황무지로 납치당하던 날, 그녀를 구하러 머나먼 길을 달려온 엄마는 분명 당부했다. 뒤돌아보지 말 것, 떠나온 길대로 앞만 보고 내달릴 것,…
동해 바다는 물때보다도 바람이 문제였다. 방파제에 올라서니 눈을 제대로 못 뜰 정도로 바람이 거셌다. 앞바람을 맞은 탓에 봉돌이 멀리 나가지 못하고 금방 고꾸라졌고, 물 밖으로 드러난 낚싯줄도 곧이곧대로 뻗지 못하고 휘어버렸다. 초릿대가 세차게 흔들려도 이것이 물고기의 입질 때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