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한 여자가 조용히 미쳐가는 이야기다. 왜 미치는 것일까? 무엇이 미치게 하는 것일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겪은 폭력적 경험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그런 경험과 기억은 수면 밑에서 그녀의 마음을 착실하게 갉아먹고 있었을 것이다. …
《누가 승리자인가? 당신인가? 당신이 무엇이기에? 합격생이기에? 정규직이기에? 미남미녀이기에? 사장님이기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에? 대통령이기에? 황제이기에? 장신구에 새겨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모습을 보라. 이마에 드리워진 월계관이 황제라는 높은 지위에 어울린다. 월계관은 뛰…
《누군가에게서 후광(halo)이 느껴진다? 그는 성인(聖人)인지도 모른다. 종교화에서는 성인 머리 뒤에 환한 빛을 그려 넣는 관습이 있다. 그래서인지, 혹세무민하려는 자칭 성인들이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시원하게 밀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후광 효과를 얻기 위해서. 진짜 성인을 마…
《내 작은 소원 하나가 이번 여름에 이루어졌다.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대성당이 성모승천일을 맞아 유서 깊은 행렬 의식을 재개했기에, 성당에 고이 보관되어 있던 성모상을 지고 시내를 도는 행렬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지나가던 여행객으로서 구경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침내 그 행렬 안으로 …
《2024년 파리 올림픽 개막식이 남긴 이미지 중에는 잘린 머리통을 들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다. 전 세계의 남녀노소가 보는 개막식에 잘린 머리통이라니, 이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퇴폐적이지 않은가. 글쎄, 이 정도가 퇴폐적이라면, 일본 문인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무주공 비화’에서…
《정물화는 극히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사물을 즐겨 묘사한다. 정물을 그리는 이에게 야심이 있다면, 그 사소한 것에 중대한 것을 담거나, 그 비근한 데서 원대한 것을 담거나, 그 일상적인 데서 초월적인 것을 담거나, 그 범용한 데서 아름다움을 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야심이 있다면, 그…
《서양미술사를 소개하는 미술관을 시대 순서에 따라 관람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선가 중세의 종교화가 자취를 감추고, 그다음에는 르네상스 시기의 초상화가 자취를 감추고, 곧이어 인상파의 풍경화도 자취를 감추고 마침내 현대 추상화가 걸려 있는 전시실에 들어서게 된다. 그곳에는 도대체 뭐가 뭔…
트레이너가 운동선수에게 닭가슴살을 먹으라고 권했을 때, 그 선수 얼굴이 빨개지며 이렇게 대답했다면? “닭가슴살이라뇨. 너무 야해서 못 먹겠어요.” 닭가슴살을 야하게 느끼다니, 이런 사람은 변태성욕자 버금가는 변태가 아닌가. 변태가 따로 있나. 여느 사람과 야릇하게 다른 것을 느끼면 변…
고대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Plinius)는 ‘박물지’에서 회화는 그림자의 윤곽을 그리면서 탄생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자가 서양 회화사에서 계속 중시된 것은 아니다. 중세 종교화에서 그림자의 흔적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중세 종교화 속에 등장하는 각종 성인들, 순교자들, …
송나라 휘종(徽宗·1082∼1135)은 천재적 예술가라는 미명과 나라를 망하게 한 못난 황제라는 오명을 함께 가지고 있다. 1126년에 금나라는 송나라 수도 개봉을 함락시켰고, 휘종은 금나라에 잡혀갔으며, 도교(道敎)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는 비난이 뒤따랐다. 많은 이들은 휘종…
나는 누구인가. 살면서 다들 한 번쯤은 던져보았을 질문이다. 혹시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 아닐까. 인간이 늘 변하고 있다면, 차라리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무엇으로 변신할 것인가. 자기가 누군지 알고 싶은 욕망만큼 강렬한 것이, 자기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이다. 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
관객은 실로 다양하다. 미술 전문가들부터 시작해서 관람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까지. 선생님을 따라 단체 관람 온 학생들은 물론이고, 모작(模作)을 그리기 위해 온 화가도 있고,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온 연인들도 있다. 유럽의 미술관에는 은퇴한 노인들이 많이 오는 반면, 한국의…
자기 자신이야말로 변치 않는 관심의 대상이 아닐까. 타자를 사랑하거나 증오해도, 결국 자신을 통해서 사랑하고 증오하는 법. 고통도 쾌락도 슬픔도 즐거움도 결국 자신이 느끼는 법. 그러다 보니 도대체 자신에게 무관심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신을 제대로 알기는 쉽지 않다. 왜? 자신을 대상…
미셸 투르니에가 말했듯이, 성탄절부터 정월 초하루까지의 일주일은 시간 밖의 괄호와도 같다. 실로 이상하지 않은가. 성탄절이 띄운 기분은 어디로 착지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그 마음의 공백 속에서 한 해의 기억은 눈발처럼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다 보면 자제력을 잃은 나머지 자칫 맥락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