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백자 전시 ‘군자지향(君子志向)’에는 15세기 말 조선을 통치했던 성종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성종은 백자 술잔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술잔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하여, 술을 따라도 티끌이나 찌끼가 모두 보인다. 사람에게 비유하면, 한 점 허물 없이 공정…
모든 것은 결국 흩어져 사라진다. 따라서 컬렉션은 흩어져 버리는 경향에 대한 저항이다. 모든 것을 모아둘 수는 없다. 따라서 컬렉션은 일부만 모으는 선택이다. 무엇을 모아두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선택은 필연적으로 선택 기준을 동반한다. 따라서 컬렉션은 가치의 위계를 정하는 행위다. …
그때도 겨울이었다. 학생들과 차를 빌려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하염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고속도로. 다소 황량하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한 풍경 속에 이따금 집들이 저 멀리 보였다가 사라졌다. 앞에 앉은 학생이 혼잣말처럼 말을 꺼냈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
괴물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서로 다른 종(種)이 결합하여 부자연스러운 개체를 만들 때 탄생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암말과 수탕나귀가 교배하여 태어나는 동물인 노새가 종종 괴물로 취급받곤 했다. 미노타우로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러한 대표적인 괴물이다. 미노타우로스는 머리와…
양육자가 아기에게 베푸는 사랑이 여느 사랑보다 더 고결하다고 이야기되곤 하는 이유는 아기가 무력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생존할 수 없는 대상을 앞에 두고, 많은 양육자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겨를이 없다. 눈앞에서 아장거리는 저 미약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에너지와 …
희망이란 무엇인가? 무엇인가 바라는 일이다. 왜 바라는가? 뭔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핍이 있기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결핍 없이는 희망이 존재할 수 없지만, 결핍에 안주하고 있어도 희망이 없다. 결핍을 느끼되 거기에 안주하지 않을 때 희망이 생긴다. 이토록…
인간은 뭔가 희망하는 동물이다. 지금 당장의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상상하고 소원하는 동물이다. 그 소원이 가진 동원의 힘은 굉장하다. 인간에게는 소원이 있기에, 현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분투한다. 설령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무엇인가 소원하는 한, 아무것도 소원…
테세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테네 왕이다. 그와 관련된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이야기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는 황소와 교접하여 몸은 사람이지만 머리는 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이에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한번 들어가면 …
대중 매체에 글을 쓰다 보면, 독자 편지를 받을 때가 있다. 그중에는 단순히 자기 독후감을 적은 것도 있고, 오탈자를 지적하는 것도 있고, 일방적인 비방을 늘어놓는 것도 있고, 황홀한 찬사를 써서 잠시 숙연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
세간의 이목를 집중시킨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끝났다. 이 드라마를 둘러싼 관심의 상당 부분은 이른바 장애인의 재현 문제에 있다.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초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을 원톱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주인공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의 현실과는 동떨어…
장의사나 장례지도사처럼 직업상 시체를 자주 대해야 하는 이들 말고, 일반 사람들이 시체를 보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대개 시체를 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도 야산에서 변사체를 발견하거나, 문을 열었을 때 목맨 시체가 매달려 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
한반도 삼면이 바다라고는 하지만, 바다를 보려면 큰마음 먹고 먼 길을 떠나야 한다. 상당한 시간과 돈을 들여 호젓한 바닷가에 도착해야 한다. 힘들여 도착하여 마침내 텅 빈 바다, 텅 빈 하늘,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만나 만드는 간명한 수평선을 본다. 이 단순한 풍경을 오래도록 보는 것…
스위스 바젤의 도미니쿠스 수도원 공동묘지에는 ‘죽음의 춤(Danse Macabre)’을 소재로 한 벽화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해골 둘이 아이를 둘러싸고 춤추고 노래하는 그림이다. 해골이 노래한다. “아장거리는 아가야, 너 역시 춤을 배워야 해/네가 울든 웃든 너 자신을 지킬 수 없어…
한 여성이 짐을 끌고 있다. 이것은 불가리아 태생의 예술가, 크리스토(1935∼2020·본명 크리스토 블라디미로프 자바체프)의 작품이다. 일견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일단 ‘웨딩드레스’라는 제목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짐을 끌고 있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 삶에서 그래도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좋건 싫건 이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 중세의 광장에는 “죽음은 확실하다. 다만 그 시기만 불확실하다”(mors certa hora incerta)라고 적혀 있곤 했다.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죽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