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에 누워 서너 시간 동안 하늘에 지나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보곤 했다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지금 잘 지내고 있을까. 그는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누워서 구름을 본 것일까. 구름에서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영국 시인 셸리의 시집 구름 삽화에는 여인이 그려…
간밤에도 착실하게 늙어갔다. 얼굴에 비누 거품을 칠하고 세면대 거울 앞에 선다. 그리고 거품에 대해 생각한다. 거품은 묘하구나. 내실이 없구나. 지속되지 않는구나. 터지기 쉽구나. 존재하기는 하는구나. 확고하게 존재하는 건 아니구나. 그러나 아름답구나.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구나. 그…
어느 날 자식이 입대한다. 입영하는 길이므로 자식은 특별히 화려한 옷을 입거나 특별히 누추한 옷을 입지 않는다. 대체로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떠난다. 그리고 며칠 뒤, 군복을 입기에 이제는 필요 없게 된 그 평상복이 우편으로 어머니에게 되돌아온다. 적지 않은 어머니들이 돌아온 그 옷…
하루 중 언제 박물관에 가는 것이 가장 좋을까. 언제 가야 인파에 시달리지 않고 호젓하게 관람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시간인 주말 오후는 피하는 것이 좋다. 박물관이 문을 여는 이른 오전에 가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예상외로, 아침에 박물관을 …
※ 이 글에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열면 꽤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얼핏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 뒤에는 그 사람 나름의 고충이 숨어 있다. 누군가 너무 돈을 밝힌다? 그는 어쩌면 가족을 간병하기 위해 큰돈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누군…
※이 글에는 ‘퍼스트 카우’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고 나면 더 이상 보기 전 마음이 아니게끔 만들어 주는 영화가 있다. 밀가루처럼 흩날리는 마음을 부풀어 오른 빵으로 만들어 주는 영화가 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내 마음을 빵으로 만들어 준 영화, ‘퍼스트 카우’에…
최근 열린 중국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는 이른바 역사 결의를 통과시켰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초석을 놓는 당대회에서 첫 번째 역사 결의를 채택한 적이 있고, 문화혁명 이후 새로운 중국을 천명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역사 결의를 통과시킨 적이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역사 …
*이 글에는 ‘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몸을 탐닉하는 영화 ‘듄’(砂丘)이 그리는 우주에는 동등한 국가들이 세력균형을 이루는 국제질서가 없다. 미래의 우주는 강력한 제국이 지배하는 곳이다. 제국이라고 해서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직접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봉건 귀족들…
한국 사람이라면 대개 신라 화가 솔거의 일화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는 너무 진짜 같아서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같은 새들이 날아와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화가 솔거보다는 머리를 벽에 쿵! …
갱 영화는 정치에 대해 의미심장한 진실들을 일러주곤 한다. 갱 영화는 권력, 조직, 리더십, 세력 다툼 같은 정치의 중요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코언 형제의 1990년 작 갱 영화 ‘밀러스 크로싱’은 정치 리더십에 관한 고전, 영화판 ‘군주론’이다. 1920년대 미국의 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인간이 협잡과 음모를 일삼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권력 지향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인간은 정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
그림책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을 펼치면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한 수박밭 한가운데 농사꾼 앙통이 우두커니 서 있다. 그의 주변에는 잘 익어 탐스러운 수박이 가득하건만 앙통은 세상을 다 잃은 듯 좌절한 모습이다. 누군가가 수박 한 통을 훔쳐갔기 때문이다. 단순히 수박 한 통이 사라졌다는 문…
사람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 법이라는데, 간혹 외국 여행이 그 변화의 계기를 줄 때가 있다. 외국 여행이 쉽지 않던 조선시대에도 공식적인 외국 여행 기회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일이었다. 17세기에는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 현지 구경을 해보겠다는 열망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나는 블라우스가 정말 아름다운 옷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뜻 사서 입지는 않는다. 옷을 사 입을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옷이 예쁘다고 해서 그 옷을 입은 자신이 예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이다. 옷을 사 입을 때는 단순히 예쁜 옷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
동북아구술문화연구회(동북구연)에 다녀왔다. 이렇게 말하면 학회에 다녀온 줄 알겠지만 동북구연은 학회가 아니라 젊은 스탠딩 코미디언 모임이다. 당신이 소파에 누워 TV 코미디 프로를 시청하는 동안 이 젊은이들은 서울 을지로에서 격주로 만나 자신들의 농담 실력을 갈고닦아 왔다. 아무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