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치매가 두렵다. 죽음은 그만큼 두렵지 않다. 죽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그에 대해 정교하게 두려워하기도 어렵다. 의식이 소멸한 죽음 상태에서는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치매는 다르다. 인지 기능은 현격히 저하되었는데, 의식은 소멸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감당…
그리스 신화에는 신에게 감히 도전한 이들이 나온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를 유혹한 익시온,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의 증손자답게 죽음의 신을 능멸한 시시포스, 아들 펠롭스를 삶아서 신에게 거짓 대접하려고 한 탄탈로스. 19세기에 출판된 호라티우스 작품집 속 삽화에 나오는 것처럼…
※이 글에는 ‘자산어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는 19세기 조선을 다룬다. 19세기에는 주류 학문 경향에서 벗어난 새로운 흐름, 즉 세계의 경험적 탐구에 대한 드높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이준익 감독은 그 관심의 결과인 정약전(…
※이 글에는 ‘미나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 유학 막바지 시절 이야기다. 졸업이 다가오니 새삼 취업 문제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지난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니, 무작정 귀국한다고 취직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에서 구직활동을 하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쥐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20세기 이전에는 진시황(秦始皇)이나 주원장(朱元璋), 20세기 이후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을 꼽는 사람이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진시황, 마오쩌둥, 주원장은 모두 정치 권력뿐 아니라 문화 권력까지 장악하려 들었다는 특징이 있다. …
※이 글에는 영화 ‘소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학 시절에 지나칠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하는 후배를 만난 적이 있다. 왜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좀 더 근사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오, 그런가. 이 대답은 오래 뇌리에 남았다. 공…
바이러스 감염 경로 추적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람들의 동선이 주목받는 시절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동선은 좀처럼 박물관으로 향하지 않는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시장이 자주 문을 닫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볼 것을 갈구하지만, 그 욕구는 박물관이 아닌 온라인…
연말연시를 맞아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독자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을 원하는 청탁서가 날아왔다. 답장을 쓴다. “절망을 밀어낼 희망과 위로를 말할 자신이 없어 사양합니다. 너른 양해 바랍니다.” 희망이 없어도, 누구나 자기 삶의 제약과 …
※이 글에는 영화 ‘타인의 삶’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변하는가? 플로리안 헹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타인의 삶’에 나오는 구 동독의 고위 관료는 말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아.” 인간을 자기 예측대로 통제하고 싶은 사람은 인간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이…
‘장자(莊子)’의 내용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호접몽(胡蝶夢)이다.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막상 꿈을 깨어 보니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더라는 그 유명한 이야기. 영화 ‘매트릭스’가 활용하기 이전부터 호접몽 이야기는 많은 사…
번영하는 도시와 그 안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묘사한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는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태평성시도는 현실을 핍진하게 그린다기보다는 존재했으면 하고 바라는 이상적인 도시 상태를 그린다. 반면 한국 회화사에서 현실의 도시 속 거지 그림을 찾기는 쉽지 않다.…
서양 회화사에서 여성이 책 읽는 모습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에 많이 그려진 수태고지(受胎告知) 그림이 그 좋은 예이다. 대개의 수태고지 그림에서는 성령(聖靈)에 의하여 잉태하였음을 마리아에게 알리려고 온 천사 가브리엘과 그 소식을 듣고 놀란 마리아의 모습이 그림…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고 역병이 창궐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인류 문명의 위기를 이야기한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좀 더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 이러다가는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멸종해 버릴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공룡은 한때 이 지구에서…
※이 글에는 ‘폭풍 속으로’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핑 영화는 현실 도피의 영화다. 현실이 힘겨운 사람들은 현실의 가장자리인 해변으로 간다. 거기서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현실의 강고함을 인지한다. 잠시나마 현실을 떠나고 …
파도를 그리는 일과 물을 그리는 일은 다르다. 명멸하는 마음의 진동과 그 마음의 뼈를 그리는 일이 다르듯이. 동아시아의 회화사에는 파도에 집착해 온 전통이 있다. 1825년에 목판화 연작으로 간행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