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시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가지 변화를 불러왔다. 서울시 행정의 최고책임자가 변화했고, 집권당의 지지율이 변화했고, 유권자들의 마음도 변화했다. 한강변의 아파트 외벽에 걸린 한 플래카드 구호도 변화했다. “50년 된 아파트 깔려 죽기 직전이다! 박원순 시장 같이 죽자!!”에…
※이 글에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나이 40이 넘어 망해 버린 영화 프로듀서 찬실이의 이야기다. 찬실이가 공들여 준비하던 장편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술을 퍼마시던 영화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엎어…
눈이 많은 곳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은 ‘하얗다’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을 언젠가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주장을 처음 한 것은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라는 프랜츠 보애스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에 따르면 캐나다에 사는 이누이트 사람들과 서남 알래스카에 사는 유피크…
※이 글에는 영화 ‘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5월에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고, 현금과 회식과 카네이션과 선물이 넘친다. 5월은 아마도 푸를 것이고 아이들은 아마도 자랄 것이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본다. 본 적이 있는 영화이기에 ‘시’가 …
19세기 프랑스 작가 발자크는 “도시는 끝없이 행진할 뿐 결코 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시도 갑자기 쉬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소나기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하던 일과 가던 길을 멈추고, 비를 피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진다. 펠릭스 발로통(1865∼1925)의 1894년 작 석판…
그림은 자기 마음껏 음미하는 게 일단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그림은 배경 지식을 통해 더 풍부하게 음미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다음 두 그림이 그 예이다. 첫 번째 그림의 주인공은 쇼군(將軍)은 아니었지만 무로마치(室町) 막부 배후에서 실권을 장악하여 “전국시대의 막을 연 남자(戰國の…
14세기 유럽, 역병이 돌자 사람들은 성모상을 앞에 두고 기도한다. 성모 마리아는 죽은 아들을 안고 눈물을 흘린 사람. 그 자신 고통 받은 사람이기에, 상처받은 이에게 위로를 준다. 각별한 기도의 대상이 된다. 지금도 유럽 중세 도시의 뒷골목을 걷다 보면 골목의 벽감(壁龕·벽의 움푹한…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을 빈부 격차에 대한 우화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진짜 가난을 겪은 사람들은 말할지 모른다. ‘기생충’의 빈민 묘사는 가짜라고. 진짜 가난한 사람은 대학 재수를 꿈꿀 수 없다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다고, 부잣집에 자신을 소개해 줄 친구도 없다고. 북한 …
또 선거철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무도회가 벌어졌다. 사진기자 혹은 화가는 이 무도회를 잘 그려 후대에 남겨야 한다. 사람들은 그의 사진 혹은 그림을 보고, 과거를 기억하고 평가할 것이다. 정치꾼 혹은 춤꾼들은 한껏 역동적으로 움직이기에, 무도회 그림은 정지된 사물을 그리는 정물화와는 …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아이리시맨’이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이다.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등 미국 고전 갱 영화들에 출연했던 명배우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전쟁 영화가 실제 전쟁을 그대로 담지 않듯이 갱 영화가 실제 갱을 그대로 담지는 않는다. 갱이 아니라 갱…
바삐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라. 인생에서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요, 건강이 중요하죠. 그러나 심각하게 아파본 적 없는 사람들은 건강이 그토록 중요한지 절감하지 못한다. 건강을 잃어 보고서야, 혹은 건강을 잃을 위기에 처해 보고서야 건강의 중요성을 비로소 절감한다.…
얼마 전 ‘국민과의 대화’라는 행사가 열렸다. 정치적 소통을 위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 300명과 대통령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행사 주최 측에서는 “세대·지역·성별 등 인구비율을 반영했으며 노인, 농어촌,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지역 국민들을 배려했다”고 밝혔지만, 비판의 …
※ 이 기사에는 영화 ‘모리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 M 포스터의 소설 ‘모리스’는 동성애가 금지되고 신분제가 엄존하던 20세기 초 영국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버지의 옛 동업자를 통해 취직하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지켜 주고 욕정을 덜어 주고 아이를 낳아 줄 여자…
창작자의 존재를 지워야 성공할 것 같은 예술이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그림을 생각해 보자. 떡볶이를 너무 진짜처럼 그린 나머지, 누군가 실제로 그 그림을 진짜 떡볶이로 착각하고 먹으려 들 때 화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변기를 너무 진짜처럼 그린 나…
공권력은 폐허를 감춘다. 폭력과 재난이 발생한 곳의 삶은 폐허일 수밖에 없지만, 공권력의 화장술은 폐허의 사금파리들을 시야에서 흔적도 없이 치워버린다. 공권력이 폐허를 가리고 덮어 사람들의 망각을 부추길 때, 예술가들은 사람들에게 폐허를 애써 상기시킨다. 영화 ‘벌새’ 역시 그런 폐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