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50일 남짓 남았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하루가 이르게 저물고 빠르게 추워지는 계절에는 마음이 갈피 없이 흔들린다. 한 해의 끝자락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놓쳐버리는 것 같은 기분. 올해 나는 어떻게 살았더라. 나는 행복했던가. 자꾸만 돌아보아도 뭔가 중요한 걸 잃…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느 젊은 독자의 메시지를 받았다. 미래는 막막하고 생활은 불안하고 사랑은 떠나갔고 자신은 초라하고 마음은 부서졌다고. 견디기가 힘들다고. 메시지가 울고 있었다. 어쩌면 좋을까. 내 이야기를 건네줄 수밖에.등허리까지 긴 머리카락을 목덜미까지 싹둑 잘라본 적 있다…
살다가 사는 게 막막할 땐 시장에 간다. 빈 장바구니 하나 들고서 털레털레. 오래된 동네에 동그랗게 파놓은 굴속 같은 시장에는 온갖 푸르싱싱한 것들과 맛깔스러운 냄새와 부대끼는 소란과 억척스러운 활력이, 터질 듯이 꽉 들어차 있다.채소 장수, 과일 장수, 생선 장수, 호떡 장수, 국밥…
동네 도서관에는 특별한 책상이 하나 있다. 달마다 사서가 좋은 책을 골라 책상에 올려두면 “‘필사’적 읽기”라는 참여형 프로그램이 이뤄진다. 오가는 사람들 누구나 책상에 앉아서 책을 필사할 수 있다. 노트 앞장에는 사서의 글씨가 적혀 있다. ‘날짜와 소감, 쪽수를 남겨주세요.’ 사서의…
바닥에 번들거리는 기름띠에서 기어코 무지개를 찾으려던 시절이 있었다. 스무 살이었던 나, 싸구려 알전구가 반짝거리는 민속주점에서 서빙을 했다. 주방에서 엄마가 파전을 부쳐내면 살얼음 동동 뜬 막걸리를 주전자에 퍼담아 김이 폴폴 나는 파전이랑 들고 내갔다. 시릴 듯이 차갑고 델 듯이 뜨…
“작가님이시죠?” 단골 카페 주인이 말을 걸었다. 한동네에 산 지 10년, 그간 오가며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는데 실은 그는 내 글까지 찾아 읽어본 독자였다. “불편하실까 봐 조용히 알고만 있었어요.” 그런 그가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작가님, 동네 상점에서 북토크 열어보시면 어떨까요…
제자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4년째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사이버대에서 만난 나의 첫 제자. 항암치료를 받으며 학업을 병행하던 어머니뻘 만학도였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잘 기억하고 잘 감동하던 사람, 헤어질 땐 보따리처럼 따스한 말들을 나눠 주던 사람이었다. 화상 강의 때마…
남동생 결혼식을 앞두고 고향에서 엄마가 올라왔다. 자기 전에 누워서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손님맞이랑 결혼식 식순, 혼주가 할 일 등등. 그리고 엄마에게 결혼식 끝나면 며칠 더 딸네 있다 가라고 했다. 자식들 모두 보낸 엄마가 마음 쓰인 탓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고집을 부렸다. 결혼식…
마쓰우라 야타로의 ‘안녕은 작은 목소리로’라는 책에는 ‘한 달에 한 번만 만나는 사람’ 얘기가 나온다. 한 달에 한 번만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그런 사이에는 기분 좋은 거리감이 존재하는데, 특별하지 않은 만남이어도 헤어질 땐 어김없이 ‘만나서 좋았다. 고마워.’ …
생일에 가족들이 차려준 생일상을 선물 받았다. 따뜻한 밥을 먹으며 나 사랑받고 있구나 행복해했다. 문득 스물다섯 살 생일이 떠올랐다. 내 생일 즈음에는 벚꽃이 봄눈처럼 흩날렸다. 그러나 정작 학창 시절에는 생일을 편히 누려본 적이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늘 …
엄마는 신기하다. 계절마다 딸네 집에 올 뿐인데 10년쯤 산 나보다도 우리 동네 사정을 잘 안다. 하루는 개운하게 말간 얼굴로 말했다. “골목에 허름한 목욕탕 알지? 굴뚝에 옛날 글씨로 ‘목욕탕’ 쓰여 있잖아. 여기 올 때마다 가잖아. 겉은 허름해도 안은 70, 80년대 옛날 목욕탕 …
휴먼다큐 작가로 일할 때, 대선배 피디와 편집실에서 나눴던 대화. 꼬박 20일간 한 가족의 일상을 담아 온 방대한 영상을 훑어보면서 선배가 물었다. “고 작가라면 어떤 장면을 골라 붙이겠어?” 나는 고민하다가 가족들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하는 장면을 골랐다. “자연스러워서요. 대단한 일…
태어나 처음으로 발레 공연을 관람했다. 샹들리에가 빛나는 웅장한 공연장이 낯설어 두리번거렸다. 유니버설발레단 무대를 직관하다니. 무대에서 춤추는 발레리노가 나의 제자라니. 가슴이 뛰었다. 모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 첫 제자로 스물두 살 발레리노를 만났다. 여섯 살 때부터 시작한…
단골 분식집이 있었다. 대학가에서도 오랜 명소 같은 분식집, 덮밥으로 유명했다. 제육, 오징어, 잡채덮밥이 단돈 삼천 원. 손님들은 분식집 주인을 ‘이모’라고 불렀다. “이모, 제육덮밥 하나요.” 그러면 이모님이 대접에 밥을 산처럼 퍼담고는 쏟아질 듯 수북하게 제육볶음을 덮어주었다. …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조그만 학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20여 년 만에 모교를 찾았다. 모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강연이 있었다. 학교는 세련되게 변했지만 구조는 그대로였다. 익숙한 걸음으로 도서관을 찾아갔다. 예전과 같은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시끌시끌 나를 스쳐 갔다. 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