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일본사 연재는 한국 신문상 최초의 시도. 20세기 일본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근현대 한국은 무엇을 배우고 저항했나를 중심으로 살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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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7월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가 에도만에 나타났을 때, 조슈번사(長州藩士)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마침 공무로 에도에 와 있었다. 당시 23세. 집채만 한 시커먼 증기선이 연기를 내뿜고 쏜살같이 일본 해안을 휘젓는 걸 목도한 이 영민하고 야심만만한 젊은이가 받은…
《바야흐로 총선의 계절이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총선은 그 유명한 2·12총선이다(1985년). 김대중과 김영삼이 연합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전두환 정권에 일격을 가한 선거로 투표율 84.6%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영삼의 대리인으로 출마한 이민우 후보가 …
《1858년 초 일본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에도에서는 미국 총영사 타운센드 해리스가 막부에 통상조약 체결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반대 여론을 무마하고자 막부 쇼군은 로주(老中·총리)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를, 그동안 정치에는 간여하지 않던 교토의 천황에게 보내 …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1800∼1860)라는 다이묘(大名·봉건영주)가 있었다. 도쿄의 동북쪽 일대에 있던 미토(水戶)번이라는 봉건국가의 영주였다. 정실에게서 난 형이 세자로 있었으니, 측실 자식인 그는 평생 한편에 찌그러져 있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병약하던 형이 젊은 나이…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국 조선의 특성이나 전통이 아니라 우주, 사회, 인간을 떠받치고 있는 보편 원리였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유지되고 있는 보편문명(중화문명)에 있었다. 그러니 이황, 이이나 송시열에게서 제대로 된 ‘조선론’을 볼 수 없는 것도, 19세기 말 소개된 …
《“차라리 3김 때가 나았어.” 요즘 정치판을 보며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사람은 다 지나간 때를 아름답게 기억하려는 경향이 조금씩은 있지만, 그저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요즘 우리 정치풍경은 목불인견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는 데 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사회는 국가주의로 치달았다. 낮에는 반미시위에 참여하고 밤에는 이불 속에서 재즈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지만, 전반적으로 일본 국민들은 ‘국가’를 자기 이에(家)나 무라(村)와 같은 공동체로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한국 ‘국가주의’의 정점이었을 유…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 한국 독자들에게 좀 낯선 이름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孫正義) 회장이 존경했다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이었다고 하면 조금은 더 가깝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막부의 가신으로 메이지 유신군이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19세기 후반 서양세력이 동아시아를 압박했을 때 중국은 화이사상을 고수하며 오만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반면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중국의 ‘자존망대(自尊妄大·함부로 잘난 체함)’를 비웃으며 민첩하게 대응했다. 중국의 ‘자존망대’야 모두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일본이라고 그렇지 않았던…
《‘가장 유명하나 완전히 잊혀진 인물’, 나는 이승만이 한국인에게 이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초대 대통령 하다 부정선거로 하야했다는 것 말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불명예…
《최근 정치권과 언론에서 느닷없이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 이름이 오르내렸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한국의 제1당 대표 앞에서 한국 정부의 외교 정책을 거칠게 비판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나는 일단 ‘위안스카이가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많이 알려져 있었나?’ 하고…
《3월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로 징용 문제에 대해 한국이 물컵의 반을 채웠으니, 이제 일본이 나머지 반을 채워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한국의 여론상 그것은 일본의 ‘또 한 번’의 사과를 의미하는 것 같다. ‘또 한 번’이라고 한 것은 우리 머릿속에는 잘 안 떠오르는 일이지만 지난 수십 …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은 소위 ‘의식화 교육’에서 사회과학과 역사서를 많이 읽었다. 그중에 ‘도야마 시게키(遠山茂樹)-시바하라 다쿠지(芝原拓自) 논쟁’이란 게 있었다. 자본주의 이행 문제를 둘러싼 ‘모리스 돕-폴 스위지 논쟁’만큼 주목받지는 않았으나, 일종의 …
《1951년에 열린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한국 측 양유찬 대표가 “Let us bury the hatchet(화해합시다)”라고 하자 일본 측 지바 고(千葉皓) 대표가 “What is bury the hatchet?(뭘 화해하자는 말입니까?)”라고 했다. 양 대표는 기가 막혔을 …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은 미국과 안전보장조약을 맺었다.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미일동맹, 바로 그 조약이다. 불과 6년 전까지 사생결단으로 태평양 전역에서 싸웠던 두 나라, 승전국이 패전국을 점령하여 지배하에 둔 관계였던 두 나라가 갑자기 군사동맹이 된 것이다. 소련이 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