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일본사 연재는 한국 신문상 최초의 시도. 20세기 일본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근현대 한국은 무엇을 배우고 저항했나를 중심으로 살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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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정오, 사상 처음으로 일본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옥구슬 같은 목소리(玉音放送)’는 아니었다. 연합국이 제시한 무조건 항복(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다. 히로히토 천황은 적군이 “새롭게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자꾸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고 …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휴일을 틈탄 공격이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지만 그 비열함에 분노한 미국인들은 일치단결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일찍이 미일 충돌을 애타게 바랐던 이승만은 1942년 6월부터 몇 차례에 걸쳐 미국의 소리(V…
《요즘 ‘전쟁의 시대가 다시 오는가?’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자 세상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구가했다. 이제 인류의 이성으로 전쟁 발발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3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냉전 시대가 …
《나는 ‘대일본제국’은 중국정책의 실패로 공중분해 됐다고 본다. 러일전쟁 후 체결한 포츠머스조약으로 일본은 한국 지배를 확정지었을 뿐 아니라 만주에 교두보를 획득했다. 랴오둥반도 할양과 남만주철도 지배권이다. 애초에 러일전쟁은 한국 지배를 노린 전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남만주 전역에…
《“지도 위의 조선국에 새까맣게 먹을 칠하며 가을바람을 듣는다.” 1910년 8월 한국 병합으로 조선이 사라진 직후,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1886∼1912)는 쓸쓸한 어조로 단가(短歌)를 읊었다. 고색창연한 왕국 조선의 운명(殞命)이 24세의 젊은 시인에게는 가을바람처럼 처연…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했을 때, 서양 열강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3·1운동을 일으키며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지만, 고독했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서양 열강은 아무도 이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중국은 탐욕스러운 서양 열강조차도 감히 혼자…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암살당하자 그의 지인 중 한 사람이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다다미가 아닌 정치 연설 현장에서 최후를 맞은 게 ‘뼛속까지 정치인’인 아베다운 죽음이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를 봤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사살되…
《요즘 일본을 경시하는 풍조(저팬 패싱)가 확산되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일본의 부진과 한국의 급격한 성장이 맞물린 탓일 것이다. 특히 경제는 아직 몰라도 민주주의는 단연 우리가 낫다는 생각은 꽤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듯하다. 한국 민주주의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일본 시민도 꽤 있다.…
《한국병합 2년 후인 1912년 7월 30일 60세의 메이지 일왕이 재위 45년 만에 사망했다. 메이지유신,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함께 겪은 일왕의 죽음. 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마음’에서 “그때 나는 메이지의 정신이 일왕에서 시작하여 일왕으로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
《1904년 2월 일본은 뤼순항의 러시아함대를 공격했다. 마침내 러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재빨리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인천에 상륙해 버렸다. 전 세계는 긴장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응원했다. 비록 극동에…
《1899년 겨울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발발했다. 5년 전 ‘동학란’이 청일전쟁을 불러온 것처럼, 이 민중운동은 러일전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러시아 군대는 난을 진압하고 나서도 만주에 머물렀다. 10만 대군이었다. 일본과 서구 열강은 철수를 요구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의견이 …
《1년 동안 연재해온 ‘한일 역사의 갈림길’이란 제목의 연재를 마치고 오늘부터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란 연재를 새로 시작한다. 20세기 일본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는,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근현대 한국은 그것에 배우고 저항하며, 그것에 당하고 이겨내며 만들어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