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일본 쓰쿠바 대학에서 박사후과정을 밟았다. 내가 속한 학과는 물질공학부였다. 물리학을 포함해 화학, 화학공학, 생물학, 반도체 등 모든 이공학과의 교수진으로 구성된, 당시로서는 앞선 융합학과였다. 나는 유일한 외국인이자, 나이가 가장 어린 막내 조수였다.학과엔 전도성 …
꼬이고 꼬인 혼탁한 지상의 상황과 달리, 가을 하늘이 탁 트인 것처럼 맑고 푸르다. 주말에 일어나면 모든 창문을 연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가을바람이 분다. 가을 햇살에 여름의 이불을 말리고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묵혔던 여름 빨래를 한다. 베란다에 널어둔 이불과 빨래가 가을 햇살과…
블랙홀을 연구하는 옆 연구실 이론물리학자 김 교수를 복도에서 만났다. “요즘 어때요?” “뭐, 과학계에 유성이 떨어진 거죠.” 얼마 전 연구재단 개인기초연구사업인 중견연구과제 발표가 있었다. 내 주위의 교수들만 봐도 열에 아홉이 연구비를 받지 못했다. 나 역시 탈락했다. 복도에서 서로…
보이지 않는 공기가 정체를 드러낼 때면 늘 문제가 발생한다. 박사 과정 때 연구차 아르메니아 공화국 뷰라칸 천문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아르메니아는 국토의 86%가 산악 지대로, 평균 해발고도가 1792m다. 참고로 서울의 해발고도는 45m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 도착해 산 정상…
새벽녘 학교에 도착할 때면 체육관에 운동하러 가는 끈 이론 전공 홍 교수를 만난다. 무슨 규칙이 있는지 모르지만, 신기하게도 물리학과가 있는 건물 입구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마주친다. 곧이어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를 하고 있으면 강남에서 한강을 따라 자전거로 출근하는 광학 전공 김 교수…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여름 감기로 한동안 고생했다. 어쩔 수 없었다. 에어컨 바람이 싫어 선풍기를 틀고 지내는 연구실과 에어컨이 빵빵 돌아가는 실험실을 오고 간 탓이다. 실험실은 실험 장치 때문에 에어컨은 꼭 틀어야 한다. 하루 종일 온탕과 냉탕을 옮겨 다니다가 감기에 걸…
대학에서 방학은 새로운 시작점이다. 위층 생명공학과 이 교수는 이번 방학에 학부생과 함께 연구를 새로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일 년에 6000만 원 정도 받던 연구비 지원이 끊겨 도통 기운이 없다. 이 교수는 실험용 개구리를 사육하고 있다. 연구비가 바닥나 개구리 굶기는 것 아…
“집에서도 공부하시나요?” 이 질문을 가끔 받는다. 당연히 아니다. 집에 컴퓨터가 있지만 전원을 누른 지 오래되었다. TV도 없다. 집에 가면 휴대전화도 멀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다. 태엽을 풀 듯 느긋하게 음악을 들으며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즐긴다. 동네 산책을 하고 책을 읽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이다. 마음이 바쁘다. 5월 8일 어버이날은 아버지 기일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몸담은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이자 고체물리학을 전공하는 실험물리학자였다. 학생 때 딱 한 과목, 아버지의 고체물리학 강의를 수강했다. 내가 유학을 떠날 때쯤에 아버지…
물리학자는 실험물리학자와 이론물리학자로 나뉜다. 나는 실험물리학자이고, 블랙홀을 연구하는 옆 연구실 김 교수는 이론물리학자이다. 양자역학이 완성되기 전까진 특별히 둘을 나누지 않았는데, 분야가 다양해지고 전문화되면서 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X선을 발견한 빌헬름 뢴…
경쟁 없는 세상은 없다. 중고등학생들은 눈앞의 입시 때문에 경쟁이 심하게 보일 뿐, 나이가 들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치밀해지고 끝도 없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나 역시 경쟁의 세계에 놓여 있다. 강의 평가, 연구 평가는 물론이고 연구비를 받기 위해 혹독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 지금까…
3월이 시작되면 학과에 풋풋한 대학 신입생뿐 아니라 신임 교수가 들어오기도 한다. 신임 교수는 부임하면 첫 세미나를 열어 학생들과 동료 교수 앞에서 자신의 연구에 관해 설명하고 앞으로 어떤 연구를 할지 소개한다. 이론물리학을 공부한 젊은 30대 초반 신임 교수의 의욕적인 첫 강연을 듣…
지금까지 만나고 있는 두 명의 친한 중학교 동창이 있다. 함께한 우정의 세월이 도대체 몇 년인가? 나에겐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들이다. 집 안의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고 있고, 부부 싸움을 하면 무슨 일로 다퉜는지, 아이들이 어떤 걱정거리를 만들었는지 등등 속속들이 다 안…
가끔 선후배 모임에 가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걸 이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대화 중에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이런 말들을 불쑥불쑥 꺼낸다. 나는 구석에서 주로 듣는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별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
어둑한 새벽, 학교에 가기 위해 문을 열고 나서자 얼음을 깨문 것 같은 추위가 느껴진다. 학교는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학교 난방 시스템이 망가져 책상 아래 작은 히터에 의지하고 버텨보지만 춥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운 대학원생들이 복도를 지나간다. 어떻게 이 밤을 지새웠을까? 기초과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