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가는 길을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왜 그대가 하필이면 우리 앞에 길을 열고 제 몸을 태우는지 바다 위에 그림자처럼 제 몸을 누이고 다가설 수 없는 길을 열어 지친 영혼을 유혹하고 있는지 나 또한 그대처럼 몸을 사르고 푸른 바다 위에 바람을 타고 生을 훌쩍 넘어서야 다가설 …
점봉산 가는 길 오늘은 곰배령까지만 간다 거기 지천으로 피었다 동자꽃 동자꽃 안주하여 술 한 잔 마신다 나도 마시고 안개도 마신다 물봉선도 취하고 노루귀도 취하고 바람꽃도 취한다 묻는다. 세상은 왜 감탄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냐고 없는 것이냐고 마을로 내려와 안개를 …
밀물에슬리고썰물에뜨는하염없는 개펄살더라, 살더라사알짝 흙에 덮여목이 메는 백강 하류노을 밴 황산 메기는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살더라 -박용래(1925∼1980) ‘황산메기’ 전문 ‘갱갱이’ 강경은 ‘강가의 햇볕고을’이다. 그래서 ‘江(가람 강)+景(볕 경)’자의 ‘江景(강경)’이다.…
나랏님도 살지 못하는 국가 보물에 살고 있으니전생의 무슨 복을 지었는지너른 뜰에 자연이 빚은 조화로움무첨당 파련대공과 맞장을 두는 봄날비탈진 언덕에 금방이라도 곤두박질칠 것 같은봉두 밥사발이 일렁인다은근한 한약향내 퉁벌이 먼저 시식하는 작약밭수줍은 털 고깔 눌러 쓴 해당화 열매덤불 위…
월악산 난간머리 희미한 저 달아 천년 사직 한이 서린 일천삼백 리 너는 아느냐 아바마마 그리움을 마애불에 심어 놓고 떠나신 우리 님을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금강산 천리 먼 길 흘러가는 저 구름아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 많은 사연 너는 아느냐 하늘도 부끄러워 짚…
가끔 전생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 생각을 끌고 산속으로 들어서곤 했다 몇백 년을 산 나무 아래 요람에 누운 듯 잠들곤 했다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 같은 햇살의 무늬가 몸 위로 지나갔다 …… 전생의 기억은 캄캄하다 전나무 숲으로 들어서는 밤 열한 시. 불쑥 내 손을 잡고 끌고…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
《철원평야에 눈이 내렸다. 두루미와 큰기러기들이 눈밭을 헤친다. 떨어진 낟알을 찾아 먹는다.두루미는 3∼5마리 가족 단위로 움직인다. 큰기러기는 수천수만 마리씩 떼 지어 다닌다. “뚜루루∼ 뚜루루∼” 두루미 울음소리는 우렁차고 크다. “끼룩∼ 끼룩∼” 큰기러기 떼 울음소리는 아이들이 …
《내가 자작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작나무가 하얗기 때문이고 자작나무가 하얀 것은 자작나무 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친구여, 따뜻한 남쪽에서 제대로 사는 삶이란 뭐니 뭐니 해도 자작나무를 찾아가는 일 자작나무숲에 너와 내가 한 그루 자작나…
이거야/가을의 꽃이불/바로 이거야/나를 그 위에 눕게 하고/누워서 백운대 넘어가는/구름을 보며/이거야 바로 이거/나는 하루 종일 아이가 되어/뒹굴뒹굴 놀다가/어미가 그리우면/아이처럼 울고/이거야 이거 - 이생진 ‘낙엽소리’에서 늙은 가을 11월. 도시는 초저녁 땅거미 어둑어둑할 때가…
청송(靑松)은 ‘늘 푸른 솔’이다. 사방이 크고 작은 산이다. 재를 넘고 물을 건너야 비로소 닿을 수 있다. 깊은 숲과 맑은 물이 청아하다. 소나무 가지에 학이 앉아있는 듯한 느낌. 느릿느릿 시간이 멈춘 고을.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 지금도 옛날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역시 ‘경…
《시도 사랑도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 왔는지를 푸른 멍이 들도록 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 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 스스로 깊어졌는지를 내 쓸쓸한 친구야 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 이쪽도 저쪽도 없이 와와…
《당신의 다리는 둥글게 굴러간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무릎으로 발로 페달로 바퀴로 길게 이어진 다리가 굴러간다 당신이 힘껏 밟을 때마다 넓적다리와 장딴지에 바퀴무늬 같은 근육이 돋는다 장딴지의 굵은 핏줄이 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근육은 바퀴 표면에도 울퉁불퉁 돋아 있다 자전거…
내가 죽으면 이 가을 물소리 들을 수 있을까. 피 맞은 혈관의 피와도 같이 골짜기 스미는 가을 물소리. 하늘 저물면 물로 접어서 동해로든 서해로든 흘려보내 이 몸의 피 다 마를 때까지 바위에 앉아 쉬어 볼거나. 이 몸의 피 다 말라서 그냥 이대로 물소리같이 골짜기 골짜기 스며 볼거…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