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이름을 불러보면 오래 소식 끊긴 친구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비비추 더워지기 으아리 진득찰 바위손 소리쟁이 매듭풀 절굿대 노랑하늘타리 딱지꽃 모싯대 애기똥풀 개불알꽃 며느리배꼽 꿩의다리 노루오줌 도꼬마리 엉겅퀴 민들레 질경이 둥굴레 속새 잔대 고들빼기 꽃다지 바늘고사리 애기원…
《누가 떠나는가목쉰 뱃고동소리로나는 태어났다누가 돌아오는가한밤중멍든 뱃고동소리로나는 자랐다벌써 석자 세치였다어제도오늘도내일도쪼르르 하나인바다는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누가 또 떠나는가억울한 것서러운 것누가 또 돌아오는가내 고향 군산은백년이나 울어준 항구였다천년이나 기나긴 탁류로 울어준…
나는 발이지요.고린내가 풍기는 발이지요.하루 종일 갑갑한 신발 속에서무겁게 짓눌리며 일만 하는 발이지요.때로는 바보처럼우리끼리 밟고 밟히는 발이지요.그러나 나는,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빈 대동여지도김정호 선생의 발.아우내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던유관순 누나의 발.장백산맥을 바람처럼 달렸…
난리 속에 남북으로 부평처럼 흩어졌으니이렇게 아주 갈 줄이야 뉘 알았으리까어머님 이별할 땐 두 아들이 절했는데올 때는 한 아들이 홀로 뜰에 나아가리…이승에서 어느 길로 다시 문안드리리까외로운 신하 의리 발라 부끄러운 마음 없고성주의 은혜 깊어 죽음 또한 가벼워라다만 이승에서 한없이 슬…
순한 애벌레처럼 가는 길이 있다땀 흐르던 그 길의 저기쯤 마을이 보이는 어귀에는오래 묵은 당산나무 귀신들이 수천 천수관음의 손을 흔들며 맞이해서오싹 소름이 서늘한 길이 있다두리번두리번 둘레둘레한눈을 팔며 가야만 맛을 보여주는 길이 있다더운 여름날 쫓기듯 잰 걸음을 놓는 눈앞에는대낮에도…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새벽의 물안개처럼 저녁노을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어디론가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에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참 달다 이 봄맛, 앓던 젖몸살 풀듯 곤곤한 냄새 배인, 통영여객선터미널 앞 식당골목, 다닥다닥 붙은 상점들 사이, 우리처럼 알음알음 찾아온 객이, 열 개 남짓한 식탁을 다 차지한, 자그마한 밥집 분소식당에서 뜨거운 김 솟는, 국물이 끝내준다는 도다리쑥국을 먹는다…/통영의 봄맛, …
《붉은 새가 나는 하늘 끝 큰 바다 물가에한라산은 구불구불 서쪽 가지가 뻗쳐 있고들 가운데 작은 고을 겨우 말(斗)만 한데푸른 돌담은 짧은 대울타리와 이어져 있구나. …나는 세상일 잊으려 자꾸 술을 마시는데사람들은 멀리 귀양 온 것이 가엾다며 신선이라 불러주네.처마 밑을 배회하며 약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삼천리 화려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우…
태백산에 고시랑고시랑 눈이 내린다. 눈은 이미 수북이 쌓였다. 사위는 쥐죽은 듯 적막하다. “뽀드득 뽀득!” 눈 밟는 소리만 빡∼빡! 밀린다. 귓속의 공기가 팽팽해진다. “두둑 두두둑!” 문득 간밤에 얼었던 눈 허리 밟는 소리. 뭉툭하다. 발바닥이 푹 꺼진다. 눈이 무릎까지 빠진다. …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오래된 사원 뒤뜰에서웃어요…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자작나무의 눈을 닮고자작나무의 귀를 닮은아이를 낳으리봄이 오면 이마 위로새순 소록소록 돋고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가랑잎 우수수 지리그런데 만약에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거기에다가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
《나이 칠십이 되면 귀신이 돼간다 눈치코치, 모두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 귀 닫고 눈도 아예 감는다 이 나이에 무얼 더 바라겠냐만 왜 이리도 가슴은 답답한가 구절양장(九折羊腸) 굽이굽이 길 따라 돌고 돌아가는 그곳을 나는 알아냈다 ‘아리랑, 아리랑∼아라리오∼아리랑 고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