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째 한 해도 빠짐없이 열어 온 연주회 ‘유시연의 테마콘서트’를 지난주 무사히 마쳤다. 해마다 힘겹게 준비해 왔지만 올해는 특히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더욱 힘들었다. 그 이유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세 분의 어머니 중 두 분이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같은 두 분이 곁…
완연한 봄이 오기까지 올해는 꽤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기나긴 겨울을 넘기고 꽃이 피는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이 급한 이유는 봄에 피는 개나리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다른 나라의 꽃처럼 잎이 나고 그 다음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이…
발레리노로 살아온 25년, 내 인생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많은 추억,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수많은 사람이 떠오른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청소년기에 길고도 처절한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숨쉬는 것조차도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죄송스럽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우연…
내 고향은 인왕산이다. 요즘 한층 뜨고 있는 소위 서촌 마을로 경복궁 서쪽이자 인왕산 동쪽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곳은 중인 이하의 서민들이 살던 인간 냄새 물씬 배어나는 소박한 동네였는데, 예술가들 특히 화가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고한 동양화가 청전 이…
나는 무엇인가? 주워 왔다는 수군거림을 들으면서 자랐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집을 뛰쳐나오기 일쑤였던 어린 시절. 홀로 나를 키우던 생모는 세 살 난 나를 친부에게 맡기고 떠났다. 많은 아이들이 일정한 시간이 되면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곤 했다. 그들과 닮지 않은 …
“저를 믿습니까.” 당돌한 질문이었다. 일개 선수가 감독에게 자기를 믿느냐고 묻다니. “믿어.”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1983년 11월 어느 날. 일과를 마친 서울 중구 신당동 한국전력 배구단 숙소는 조용했다. 오후 9시가 넘었을까. 후배가…
삶을 돌아보면 성공과 실패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만으로도 그저 충분하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가장 가깝고도 먼 사람, 내가 가장 닮은 사람, 바로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집에 가끔 들어오셨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바깥에서는 늘 바쁘셨지만 도…
삶을 되돌아보면 정말 많은 분의 사랑과 격려, 보살핌 속에서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누군가의 손에 끌려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수 있었듯이 그렇게 지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고백하곤 한다. “내가 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들 덕입니다.” 도움을 준 수많은 사람 중에서 …
보통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여행을 좀 많이 한 셈이다. 유럽을 사랑해서 유럽에서 사온 책자와 배지를 보면 금방 흥분한다. 여행은 내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덕분에 누구에게나 “내가 부자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윌리엄 워즈워스가 시 ‘수선화’에서 수선화가 준 자연의 선물을 떠올리…
나는 ‘목포맹학교’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서울맹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내내 특수학교를 다녔다. 학교생활은 대체로 만족스러웠으나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서글픔을 느낀 적도 자주 있었다. 맹학교를 다니면서 ‘보는 친구’들과 함께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꿈꾸…
6·25전쟁 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서울은 전쟁이 난 지 3일 만에 인민군 천하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서울 집을 떠나 시골집이 있던 경기 일영으로 피란을 갔다가 몇 달 만에 중공군의 남하로 다시 남쪽으로 피란길을 떠났다. 나흘을 걸어서 도착한 피란지는 경기 화성군의 바닷가…
전쟁이 터지고 일주일쯤 되었을 때다. 10리가량 떨어진 산골 마을을 피란처로 정했다. 마을로 가는 도중 맞은편에서 지게를 진 아저씨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나이가 많이 들어보였다. 그는 우리 삼형제를 보더니 몸을 낮추고 한 개씩만 집어가라고 하셨다. 발채에는 잘 익은…
고향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나는 유목민이었다. 담도 울타리도 없는 집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도 아닌 몇십 년을 노출의 비애를 맛보며 그렇게 마구잡이식으로 살았다. 정신문화의 수도로 자처하는 그 완고한 고장에서 결손가정의 아이로 …
1988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1995년까지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6개를 올랐다. 그러자 인생의 목표가 명확해졌다. 무모한 것처럼 보였지만 대외적으로 “14좌 완등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14좌 완등이 어디 쉬운가. 봉우리 한 개에 도전할 때마다 엄청난 준비가 필요…
나를 있게 한 그 사람은, 바꿔 말하면 ‘너의 인생은 누구에게 부채를 졌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일 것이다. 생선 장수 아버지는 조건 없는 후원자였다. 아버지가 활어 수출선에 부탁한 덕분에 초등학교 때부터 왕자표 대신 사쿠라, 붐도로, 홀바인 상표의 크레용과 물감, 붓을 사용했다. 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