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오늘 농구선수 됐어.” 서울 광희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는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농구선수 할 사람 손을 들어라”고 말씀하자 서슴없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던 내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무슨 큰 상…
서울예고는 내가 음악가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해준 곳이다. 음악생도들과 나눈 대화, 미술과 학생의 그림으로 가득 찬 복도, 오케스트라 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무용과 학생들의 ‘백조의 호수’ 공연…. 지휘과가 없어 작곡과로 들어간지라 지휘를 배울 수는 없었지만 학교의 예술적 환경은 사…
시댁에서는 달마다 제사를 지내고 설과 추석에 따로 차례를 지냈다. 아버지가 목사인 기독교 집안에서, 응접실에 소파가 놓여 있고 서재가 따로 있는 서양식 집에서 자라난 내가 맏며느리가 돼 시댁의 한옥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시댁 분위기에 젖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어머니(…
나의 은사이자 이젠 감히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로버트 라스뮤센 씨를 만나게 된 건 히피문화와 펑크아트의 발상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였다. 1993년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히피문화와 펑크아트에 매료돼 떠났던 타지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 당시 자유로운 정신을 …
아홉 살 때 처음으로 연극을 봤던 생각이 난다. 부민관(현재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공연하던 극단 신협(국립극단의 전신)의 ‘원술랑’이었다. 신라 김유신 장군의 아들 원술랑 얘기다. 원술랑을 사모하는 소녀 진달래 역을 맡았던 배우 김선영의 청아하고 낭랑한 목소리, 컴컴한 무대에서 조명을…
하나의 인격체로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누구인가 묻는다면 대부분 어머니를 들 것이다. 자식 걱정을 어머니만큼 하는 사람이 없고 그 심정은 자식의 품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사는 행운을 누리는 …
숨이 턱턱 막혔다. 어깨에 연탄을 짊어지고 달동네 좁은 골목을 힘겹게 오를 때면 배고픔은 차라리 사치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 나의 중학교 시절은 새까만 연탄 자국과 땀 냄새가 뒤섞인 암울한 회색빛이었다. 동생들을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천신만고 끝에 열아홉에 사회생활을…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생각해 본다. 나를 있게 한 사람을 생각하면 스승님들이 떠오른다. 나는 세 분의 피아노 선생님께 배웠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뇌막염으로 서너 달 학교를 쉬어야 했다. 외할머니가 …
나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아버지는 항상 극복의 대상이었다. 유능하고 잘생긴 변호사였던 그분은 언제나 호탕하셨다. 술도 많이 마시고 놀기도 잘하셨다. 글을 잘 쓰셨지만 결코 착실한 편은 아니어서 책은 한 권도 남기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당시 집안 망하는 첩경이라던 국회의원 출마, 광산 투…
대구중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면서부터 포수가 마음에 끌렸다. 마스크를 쓰고 앉아 소리를 지르며 수비진을 지휘하고 투수를 리드하는 게 멋있어 보였다.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면 힘들 때도 있다. 섭씨 37도를 오르내리는 한여름에 경기를 치르면 몸무게가 2∼3kg이나 빠졌다. 그래도 포수 …
유전적 자산은 한 사람의 모습과 운명을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결정한다. 당연히 누구에게나 부모가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부모는 가장 중요한 환경이기도 하다. 사람은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배우는 줄도 모른 채 배운다. 삶은 깔끔할 수 없고 굴곡이 심하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의 삶에서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