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 발 끝에 차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 1936년 2월21일 오후 4시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
‘통사(痛史)’와 ‘혈사(血史)’. 박은식의 민족주의 역사관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두 역저 ‘한국통사(1915)’와
19세기말 국가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같아 내일을 예측할 수 없었던 조선 망국기(亡國期)의 지성들은 조국의 앞
구한말 항일구국운동의 선봉이자 유림(儒林)의 최고봉이었던 면암 최익현. 1906년 유배지인 일본 쓰시마(對馬)섬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1833∼1906)이 살다간 시대는 동아시아를 ‘천하’로 인식하던 조선인들에게 의식의
매천 황현 하면 역시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유려한 문체,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예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다 쓰시마(對馬)섬으로 끌려가 “내 늙은 몸으로 이 원수의 밥을 먹고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영재 이건창. 그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을 이어받은 강화학파의 적자(嫡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浪人)의 손에 시해되고 시신이 불태워지는 처참한 변고가 있은 뒤 친일내각이 구성되고 국
19세기초 실학을 시대사조로 확립한 정약용(丁若鏞)이 한밤중에 일어나 등불을 켜고 근대의 새벽을 기다렸다면 19
최한기가 빠진 한국과학사는 있을 수 없다. 그는 개항 이전까지 서양의 자연과학을 가장 많이 그리고 제대로 소개
한국 지성사의 최고봉인 다산 정약용. 그는 탁월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천문 기상 의학 수학 기하학 농학 지리 물리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조선사회가 절박하게 요구하는 변혁의 방법과 방향
18세기 조선 실학의 선두주자요, 진보적 개혁사상가였던 이익. 하지만 그는 여성에 대해서 만큼은 지극히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