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엔 임진 병자 양란의 파괴와 혼란을 딛고 사회가 크게 발전했다. 농업 생산이 증가했고 이것이 상업 수공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군자되기를 자부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공부에 힘쓰고 과거를 거쳐 벼슬에 나서는 것을 이상으로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지식으로만 인재를 뽑는 과거제도에 회의를 품었던 유형원. 그러나 그런 유형원도 실은
조선 전기에 사림은 여러 번 사화를 당하면서 부침을 거듭하지만 16세기부터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면서 대세로 자리
조선 붕당정치의 두 거목 송시열과 허목. 이들은 서인과 남인의 영수로서 대결의 길을 걸으며 부침을 거듭했다.
조선사에 있어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17세기, 그 한복판엔 우암 송시열이 있었다. 그가 벌였던 뜨거운 논쟁의 하나
17세기 중후반 조선사회는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국가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하는 국가적 당위에 직면하였
임진왜란의 후유증, 붕당정치 등으로 나라가 휘청거렸던 17세기초. 인조(仁祖)는 널리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다.
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하고 치세(治世·태평성대)에는 기능인이 요구된다면, 난세와 치세의 중간쯤엔 어떤 인물이 바
한 사람의 생애에서 전쟁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은 일생동안 두번이나
요즘 흔히 듣는 「양비론(兩非論)」의 원조를 찾으라면 아마 지천 최명길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인조반정후 서
임진 병자 양란 이후의 17세기 조선사회는 명청(明淸)교체로 국제질서가 변화하고 안으로는 전란으로 인한 사회
조선시대엔 벼슬하는 것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알았다.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고 부모를 영예롭게 하는 길이 오직
조선의 운명을 백척간두로 몰아세웠던 임진왜란. 그 절체절명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간데 일등공신을 들라면 단연
16세기는 마치 밤하늘에 운석이 쏟아지듯 한국사상사에 천재들이 출현하였던 시대다. 그 중에도 고봉 기대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