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출부를 구한다는 전단을 보자 나한테 일을 시킨다는 것도 아닌데 어깨가 움츠러들며 아까 본 죠스떡볶이로 숨어들고 싶었다. 더 가볼까, 더 들어가 볼까, 아가리 벌린 괴물처럼 서울은 계속해서 장면을 보여주었다. 골목이라는 말은 여기에 붙이기에 너무 정겨웠다. 한국의 이상함을 서울에 가면…
가을에 무의미한 시는 가을을 지시하지 않겠지. 손가락질도 않겠지. 손가락질은 감정. 지시도 손가락이 있어야 가능하니까 손가락 없이는 가을도 없겠지. 가을 없이는 겨울도 없다는 말. 무의미하지. 겨울 없이는 봄도 여름도 없다는 말. 무의미하지. 의미는 뒤통수니까. 뒤통수에 있으니까. 가…
내게 머물다가 떠나버린 것들을 기억한다. / 한낮의 햇볕 속에서 나를 어루만지던 손과 내게 깊숙이 몸을 묻던 여름의 향기들. 꽃을 들고 다니던 소녀 소년들. 그 곁을 뛰어다니던 강아지들. // 성인이 된 몸이 무너져 내려도 다시 빚어주는 손이 좋았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
다 버리고 나니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그 고통으로부터 발버둥 치지조차 않은 나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은 가끔 이렇게 ‘나’와 ‘나’를 화…
그러다 우연히 ‘커스텀’ 매물을 보게 됐다. 순정 상태로는 무척이나 못생겨 보였던 바이크에 도색만 해도 이렇게 달라지고 예뻐질 수 있다니. 그럼 나도 이런 못생긴 바이크를 사다가 도색하고 커스텀을 해서 타볼까? 그러니까… 이 스쿠터 모델명이 택트라고? 어디 보자…. 중고나라, 택트 검…
달그락하는 소리와 함께 카운터 위에 유리잔이 놓였다. 자그마한 술잔에 ‘너무 많이 따라’ 가득 담긴 고구마소주.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투명하고 네모난 얼음이 반짝반짝 빛난다. 아아. 쇼코는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저도 모르게 가벼운 탄식을 내뱉었다. 고구마의 향이 강하고 묵직한…
마을에서 호수까지 작은 길이 나 있다. 보행로이자 염소들의 길. 나는 그 길을 자주 걷는데 여름철에는 수백 번 이상, 겨울에도 이따금 간다. (중략) 6월이면 이곳은 온통 월귤나무로 가득하고, 이 나무들을 모두 베어낸 너른 빈터에서는 햇빛이 비치는 날이면 일 년 내내 월귤나무와 에리카…
높은 곳에서 떨어졌거나 바닥을 구슬프게 홀리고도/멀쩡한 것들//내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주워 담을 수도 없는 것들//사람을 용서하는 일이/사람을 고치는 일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기도가 엇나가는/신의 겨드랑이 뒤에서 어린양 부리는 것들/두서없는 꿈의 멀미를 앓는 것들 …
빌리 홀리데이, 덱스터 고든, 듀크 조단, 듀크 엘링턴, 쳇 베이커, 줄리 런던, 카를라 브루니, 샤를로뜨 갱스부르, 좋아하는 영화의 OST들, 그리고 다소 유명하지 않은 재즈 트리오나 쿼텟의 앨범들. 조금 귀찮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직접 앨범을 골라서 음악을 듣게 되면 그 순간이 쉽사…
몸통에서 목이 쑥 빠져나온 것 같다/얼굴은 육체의 덤인 것 같다 혹인 것 같다 부록인 것 같다/어떤 부록은 본문보다 길고//어깨에서 팔이 쑥 빠져나오고/손목에서 손가락들이 새털처럼 찢어지고/가늘게 떨면서//어둠을 털면서/온몸을 기울여 총채를 들고 있다/팔 하나가 인생보다 길고//긴 팔…
하늘의 별은 내가 다 심었지/시인은 가끔 거짓말을 하네/하늘의 별을 포기 포기 심느라/어제 잠을 한숨도 못 잤지/흙 묻은 손을 보여주며 밤새워 어둠 속에서 밭일하던 시인/손톱 밑에는 반짝이는 별의 금물이 들었네//마취총에 맞아서 하루하루 비틀대며 가는 사람들/불안의 마취총에 맞아, 분…
세상한테 떼쓰며 대들던 소년은 가출을 하고, 세상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려고 몸부림치던 사람은 출가를 한다. 가출과 출가, 이 두 가지 여행 중에 더 진정성을 갖는 여행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출가보다 가출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훌쩍 건너가 버리는 출가는 이 세…
시월의 숲은 초록의 여운이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이 숲을 청년이라 부르기 망설여진다. 무언가 비밀을 알아버린 어른 같기 때문이다. 머지않은 소멸을 짐작한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의 어리고 젊은 시절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어른은 깨달아버린 비밀을 모른 체할 수 없는 사람이다. …
그리고 플래시를 켜고 복권을 긁었다. 또 1000원이 당첨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10분을 걸어 예의 편의점에 가서 당첨된 복권을 새 복권으로 바꾼 다음 다시 내천으로 갔다. 이쯤 되니 뭔가 저의가 있는 것 같았다. 신이 살아갈 최소한의 빌미로서 1000원을 우리 삶에 던져 놓고 …
나는 너랑 같이 있을 때 행복해 보였고 나는 너랑 있을 때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는 너를 보고 있으면 너는 나와 너무나 달라서 나는 너를 외우고 너를 따라 해봤었지만 나는 네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점점 쌓이게 됐고 매번 너의 눈을 쳐다보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