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인 포르노. 그것은 핀란드가 풍기는 몇몇 이미지에도 부합한다. 진정성, 사회 복지, 남녀평등, 관용. 인구가 극히 적은 땅과 물의 공간, 이 흡수성 토지엔 모든 것이 있다. 그리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단, 즉 미미한 신경 쇠약의 조짐만 보여도 즉시 원기를 회복하러 갈 수 있…
요즘 세상에 남편이 아내에게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말하고 아내가 ‘당신과 살아서 즐거웠어요’라며 이별을 고하는 것은 싸구려 소설도 되지 못한다. 일흔 살까지 살아온 내 인생 신조는 ‘그날그날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나, 그에게 꽤 잘했다. … 그가 죽더라도 울…
여자의 두 다리는 가위 같다. 달마다 무엇을 자르는지 두 다리 사이에서 붉은 물이 흘러내린다. 가끔은 뭉클한 허벅지로 만든 두 가윗날이 조그만 아기의 붉은 몸뚱이를 잘라내기도 한다. 이브가 다 먹은 붉은 열매가 그 속에 들어 있다가 한 달에 한 번 우는가 보다. 저자의 아시아 여행기…
“바가지의 반말을 견디는 반장, 혼자서 하루 물량 천 개를 감당해야 하는 파견직, 피가 나는 손가락을 작업대에 문지르는 신입이 되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도 여자들을 잘 안다고 자신해왔으나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다고,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룰루와 랄…
피로연이 절정에 달하자 한국 전통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 후쿠는 춤을 추며 생각했다. ‘민단도 조총련도 상관없다. 한국이든 북한이든 아무렴 어떠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동포들의 혼담을 하나라도 더 성사시키고 싶다. 그렇게라도 고이치와의 인연을 꼭 붙들어 두고 싶다’고 후쿠는 생각…
나는 때때로,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했어요. 당신도 봤죠, 분노의 대상만큼이나 어리석은, 수치스러운 분노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내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분노해서 그들이 죽었으면 싶을 때는 나도 죽었으면 싶었어요. 명예롭게…
타인의 기대와 재정 문제, 인간관계, 의무, 시장보기 등 일반적으로 나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모든 일에 새끼 기러기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사랑이 어쩌면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은 아닐 거라고, 지극히 일반적으로 우리 존재와 자연의 안락함과 …
그에게 남다른 주목과 존경을 바쳐온 또 다른 까닭은 그가 개별 인간의 자아 성찰·탐구는 물론 인간 일반의 근원적 존재성을 탐색한 문화예술가-인간이어서다. …헤세야말로 작금의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히 소환·요청돼야 할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그래서다. (전찬일 영화평론가의 ‘기획의 변’ …
각종 장애물을 넘는 훈련이 시작됐다. 자신이 사람이긴 한가, 자주 묻게 되었다. 뛰다가 벼랑에서 스스로 몸을 날리는 사람이 생겨났다. 죽음은 밥그릇 가장자리에 말라붙은 밥풀만큼이나 흔했다. 삶과 죽음이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두려움이 늘 잠재해 있었지만 그는 애써 털어냈다.…
나는 너를 잡아와/소독한 내 위에 올렸다/매끄럽고 반듯하게/싹뚝싹뚝//피투성이가 됐는데도/끊어지지 않는다//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안 보이게요/없어지게요//너를 찾아/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다//국을 끓여야지/고기 끊어 가는데//머리 자르러 오세요/전단지가 펄럭인다.(‘피투성이 식물’)…
“비로소 나는 내가 독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다른 존재에게는 독이라는 것도 알았어. 하지만 또한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나의 삶과 세상의 독이 서로 침투하는 음침한 세계를 보았던 거지. 그 두려운 세계에서 내내 살아가야 하는 운명, 나는 …
민혁이 미라의 원룸에 드나들면서 창가에 놓인 작은 꽃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었다. 그 모습이 그냥 좋았다. 물보다 햇볕이 더 필요한 꽃이라 꽃은 금방 시들었고, 곧 뿌리까지 죽어버렸다. …사랑에 빠지는 건 그런 일이었다. 그까짓 꽃, 그까짓 물 한 컵, 그까짓 안타까움, 세상의 그 모…
아유무는 농기구를 구경하다가 어떤 문구를 발견했다. 선반 위에 가로로 놓인 몸통이 굵은 나무망치 손잡이에 ‘풍요로운 침묵’이라는 글이 손으로 새겨져 있었다. … 그러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풍요로운 말이라고 했다면 이해가 되어도, 침묵은 말이 없다는 뜻인데 말이 없는 것이 풍요롭…
부모님을 그토록 사랑한다지만 우리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의무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며 평가에서 제외되기 때문이죠. 대신, 용서받을 대상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평생 우리를 용서할 수 없어요. 따라서 그 사랑은 불가능한 거죠. 이규리 시인이 시에 가닿지…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