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살이풀이 죽은 자리에 다시 한해살이풀이 자라는 둑과 단단히 살을 굳힌 자갈과 공중을 깨며 부리를 벼린 새들의 천변을 마주하면 적막도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다만 낯선 소리라도 듣고 싶어 얇은 회벽에 귀를 대어보면 서로의 무렵에서 기웃거렸던 우리의 허언들만이 웅성이고 있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으니까. 사랑 없이 산다는 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또 꿈꾸지 않고 잠자거나, 때로는 아예 잠들지 못하는 것과 같아. 이중으로 잠긴 캄캄한 방 안에서 열쇠가 있다는 걸 알지만 문을 열고 나가고 싶은 마음 없이….…
“으르라앙.” 짖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 울음소리와 신문지 바스락거리는 소리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소리였다. “저자오저즈.” 엄마가 말했다. 이건 종이접기라는 거야.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의 종이접기는 특별했다. 엄마가 숨을 불어넣으면 종이는 엄마의 숨을 나누어 받았고, 엄마의 …
이제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아주 잠깐 그는 저 별들 사이에 있는 그녀를 거의 부러워할 뻔했다. 자기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은 낯선 생물들이 그녀 몸의 길들지 않은 영역을 달리며 산맥과 협곡과 그 신비롭고 알려지지 않은 땅의 다양한 서식지들을 탐험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
영사실은 영화만 트는 곳이 아니라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은밀한 이야기까지 본의 아니게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관람석 뒤편의 2층에 자리한 영사실은 밖에서 보면 그저 작은 창을 통해 온갖 영상들이 빛을 타고 쏟아져 …
아이는 의외로 쉽게 말했다. 맞는 말이다. 지구로 온 아이, 사막으로 간 생텍스와 밀항자, 뛰쳐나가버린 아버지, 항구의 노동 속으로 자신을 밀어붙인 어머니, 바다를 선택한 나. 그런 나를 남편으로 선택한 아내. 이 모두의 공통분모는 하나다. 낯선 곳으로의 불안한 이동. 아…
아주 멀리서 가까스로 도착한 전류들이 제 몸에 잦아들곤 할 때, 눈 덮인 풍경 속으로 해가 넘어갈 적에, 어미와 새끼가 다정히 물속을 흐르는 것을 볼 때마다 상어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쉬지 않고 내리는 눈에 마음을 대면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은 열기였다. 2010년 등단한…
그녀는 맥베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자기야.” 그녀는 속삭였다. “그를 죽여야 해.” 그가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두 눈이 그녀를 향해 반짝였다. 그녀는 손을 놓았다.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때와 똑같은 결단을 내렸다. “덩컨을 죽여야 해.” ‘해리 홀레 시리…
칼리 딜래넉스에게는 뭔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 뭔가가―불길한, 너무 오래 살아남도록 만든, 혹은 생활에 치여 너무 오래 죽어 있도록 만든, 그래서 깨어 있을 때조차 썩은 내를 풍기게 만든 뭔가가.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이자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옆구리가, 어떤데요? 많이 녹아서 그래요. 그가 길게 팔을 뻗어 코트 위로 그녀의 등을 안았다. 손끝으로 그녀의 왼쪽 옆구리를 짚었다. 여기가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만지지 말아요. 그가 놀라며 얼른 손을 떼었다. 만지면 더 녹아요. 어느 겨울날 벤…
재혼요? 남자한테 다시 복종하며 사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어요! 간신히 노예 상태와 고통에서 빠져나왔는데, 다시 내 발로 그곳으로 돌아가 똑같은 혼란 속에 뒤엉키란 말인가요? 오, 신이시여! 부디 저를 지켜주소서!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일곱 명의 여성이 남…
어린 소녀야, 어서 초콜릿을 먹어,/어서 초콜릿을 먹어!/봐, 세상에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모든 종교들은 제과점보다도 가르쳐 주는 게 없단다./먹어, 지저분한 어린애야, 어서 먹어!/ 나도 네가 먹는 것처럼 그렇게 진심으로 초콜릿을 먹을 수 있다면! 포르투갈의 모…
생각해 봐라. 그가 황가의 정통 적자가 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 나라가 어떻게 나아가고 있느냐. 천황과 황태자를 암살한 이토 히로부미가 그 중심에 있다. 메이지 유신의 흑막을 진정 모르는가. 그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스스로 신이 된 것이다. 관…
나는 점점 균형을 잃어갔다. 지연이 가라앉아 있으면 나도 그리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뻗대며 뒤로 물러나면, 지연의 존재, 그에 얽힌 사물과 소리들이 내게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도망가지 않은 것이 내 실책이자 애착의 지점이 되었다. 마흔 살을 앞둔 연극배우 채선과 연극을 보러…
욕망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녀는 단번에 이해했다. 아델은 자신이 접근하는 남자들에게 어떤 욕망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갈망했던 건 그들의 살갗이 아니라 상황 자체였다. 장악당하는 것. 쾌락에 빠진 남자들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 2016년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자인 저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