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이면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위사냥을 뚝 반으로 부러뜨렸다. 그러곤 말없이 곁에 와서 내 작은 손안에 반쪽을 쥐여주었다. 나란히 앉아서 사각사각 베어 먹는 소리. 달콤한 빙과로 입술은 끈적거리고. 옥수수보다 이게 낫지? 할머니는 물었고 내가 대답 없이 마주 보고 실쭉 웃으면 다…
좋은 하루를 쌓아나가는 게 삶이라는 것, 거창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갈아 넣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것, 나를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주변을 잘 가꾸는 것, 그리고 운 좋게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산책할 기회가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을 즐기…
며칠째 비 맞아 올해 가장 부드럽고 크게 자란 깻잎을 두 봉지 듬뿍 담아 경비실 앞 나눔 상자에 내놓는다. “비 실컷 맞고 잘 자란 텃밭 깻잎이에요. 필요한 분 가져가셔요.” 메모와 함께. 경비실 앞에서 비 구경하고 계시던 할머니가 당신도 가져가도 되냐고 물으신다. “아유, 참. 할머…
어떤 미래도 2진법의 선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온라인이거나 대면이거나, 가상이거나 실제이거나가 아니다. 미래는 우리가 최신 기술을 수용하거나 거부하거나, 혹은 집에서 일할지 사무실에서 일할지를 최종 선언하는 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진정한 미래는 날마다 우리에게 …
세상에는 혀에서 구르는 듯 맛 좋은 음식들이 정말 많다. 그렇지만 어느 진미를 가져와도 내가 어릴 적부터 먹어 온 집밥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이길 수는 없다. 맛으로 새겨진 기억 그대로가 바로 집밥이라는 장르다. 몸이 많이 고되고 아픈 날, 마음을 심하게 다친 날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밥은 먹고 다니냐?” 때로는 건성으로 건네는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노릇인데, 겨울에는 김치밥과 나물밥으로 버텼고 고난의 행군 시기는 그야말로 먹지 못해 죽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던 그때, 그저 쌀밥 한 숟가락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제…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본 것, 느낀 것을 그대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고운 마음을 지니고, 어여쁜 눈을 지니고, 아름답게 보고 느낀 그것이 아름다운 말로 굴러 나올 때, 나오는 모두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여름날 무성한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의 어머니가 아들을…
아버지의 헝클어진 뒷모습을 본다. 낮잠을 한숨 주무시고 나오셨나. 납작하게 눌린 아버지 뒷머리에 초가을 오후 햇살이 내려앉는다. 한 살배기 아기 정수리에 소용돌이치듯 솟아난 보드랍고 가느다란 머리카락 같네. 눈에 띄게 헐렁해진 아버지 허리춤 사이로 바람이 지나고, 당신의 남은 시간들이…
세상 그 어떤 상대도 다 녹여 낼 듯한 눈빛은 제 자식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다. 순식간에 무언가에 압도당한 듯한, 그 압도당한 무언가를 위한, 물불 안 가리는 전사가 된 듯한 또 하나의 존재가 출현한 것 같았다. “날 죽이려는 거지, 다 날 죽일라고. 이런 나쁜…. 내가 모를…
왜 누군가는 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오는가, 아니, 와야 하는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온다는 건 대개 누군가의 돌봄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돌봄을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아 교복 대신 체육복을 입고 오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이 교사이면…
나는 현재 알츠하이머형 치매라는 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치매에 걸리기 전에는 할 수 없었지만 치매에 걸리고 나서야 새롭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치매에 걸렸다고 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고 …
가끔은 이 세계가 ‘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 ‘하지만’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아. ‘하지만’ 하고 싶은데. ‘하지만’ 실패하지 않을까. ‘하지만’ 가치가 있잖아. ‘하지만’ 결국 가치가 없지 않아? ‘하지만’은 바닷가에서 계속 파도를 맞고 있는 사람 같…
주위가 조용해진다. 순간 공간은 평면으로 변하고 시간은 멎는다. 마치 내가 본 순간이 잠시 멈춰 온 세상에 나 자신과 그 공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새로운 그림에 담길 장면을 만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순간과 조우할 때, 세상은 조용해진다. 그 순간과 나만이 남았다. 조…
자신의 모습을 지킨다는 것.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페이스와 목표를 잃지 않는 일이다. 전시 중이든 지금처럼 평화로운 때든 그 정도로 인간답고 대단한, 그러면서도 의외로 어려운 생활 방식은 없다. 무럭무럭 잘 자란 푸르른 미나리보다 오그라들고 땅바닥에 바싹 달라붙…
인류 최초로 기억의 기술을 고안한 사람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다. 그는 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두 소년이 찾는다는 소식에 밖으로 나갔고, 그 직후 땅이 흔들려 저택이 무너졌을 때 홀로 목숨을 건졌다. 유일한 생존자가 된 시모니데스에게 파도처럼 사람들이 밀려왔다. 죽은 자의 흩어진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