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PC통신 동아리 멤버들은 금요일 정기 채팅 방을 ‘자폐 방’이라고 불렀다. 분명 함께 모여 떠들었지만 언제나 저마다의 이야기로 조각조각 흩어졌다. 일상의 대화가 어쩌면 대개 그렇다. 소설이나 TV드라마 속 대화와 다르다. 뚜렷한 호응을 맺으며 흘러가지 못하기 일쑤다. …
초등학교 2학년 때이니 30년 전이다. 사촌형을 따라 유랑 서커스단 구경을 갔다. 송진 냄새 흥건한 천막을 들추고 마주한 광경은 신기하기보다 애처로웠다. 모래먼지 자욱한 작은 무대에서 소박한 묘기를 보여주던 사람들의 얼굴이 한결같이 경직돼 있었다. 지난달 처음 서울 용산구 서계동 …
한 음 한 음이 생기 있고 영롱하게 반짝이면서도 선율은 물처럼 유연하게 흘러갔다. 27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67) 리사이틀은 우리 시대의 거장과 마주하는 자리였다. 슈베르트, 쇼팽, 베토벤으로 꾸민 프로그램은 선명하면서…
프랑스 피아니스트 장에플랑 바부제(51)의 첫 내한 리사이틀은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그의 명성을 확인한 무대였다. 19일 경기 성남시 야탑동 성남아트센터에서 그를 만난 관객은 ‘유레카! 하는 탄성이 나올 듯한 마음으로 음악을 듣게 하는 피아니스트’(파이낸셜타임스)라는 평에 고개를 끄덕일…
스토리 라인이 뚜렷하지 않은 무언극이나 행위예술을 ‘퍼포먼스’라고 부르는 사람이 간혹 있다. 잘못된 쓰임이다. 퍼포먼스는 공연을 뜻하는 영어 단어일 뿐이다. 12월 31일까지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서문 쪽 주차장 가설무대에서 공연하는 ‘푸에르자 부르타’는 제목 앞에 ‘넌버벌(non-v…
바이올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68)의 내한 공연 프로그램 북에는 단 세 곡만 명시돼 있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번과 그리그 소나타 3번, 타르티니 바이올린 소나타 ‘악마의 트릴’.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타르티니 이후의 곡들은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발표되고 연주됩니다.…
108석 소극장 맨 앞줄에는 교복을 입은 남학생 셋이 앉아있었다. 창작극 초연 첫날이어서인지 만석은 아니었다. 뒤쪽으로 자리를 옮길까 말까 연신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그냥 눌러앉은 그 학생들은 공연시간 100분 내내 진땀을 뺐을지 모른다. 무대는 영세 봉제공장이 빼곡히 늘어선 서울 …
예술의 영역에 둔 글쓰기는 자칫 한가로운 방심으로 흘러가기 쉽다. 현실을 배경과 재료로 삼는다면 더욱 그렇다. 골방에서의 작업으로는 좀처럼 좋은 이야기를 빚어내기 어렵다. 많은 작가들이 불편하고 험한 일상과의 접점을 최대한 넓게 유지하는 이유다. 2일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막을 올…
“병원은 부도덕한 시설입니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건강에 극도로 유해한 시설이죠. 나는 늘 환자를, 아니 세상을 속이는 기분입니다.” 노년의 정신과 의사 라긴(남명렬)이 한참을 망설이다 털어놓은 고백. 마주 앉은 환자 이반(백익남)이 대뜸 답한다. “허참, 새삼스럽게. 다른 사…
카운터테너 안드레아스 숄의 청아한 목소리는 2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경건하면서도 아늑한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3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는 카운터테너에게 익숙한 르네상스와 바로크 음악 대신 독일 가곡으로만 가득 채운 프로그램으로 관객을 맞았다. 공연의 정점은 슈베르트의 ‘죽…
도저히 재미없을 수 없을 듯한 연극이다. 우연히 접한 그림의 세계에 매료된 광부들이 일상 속에서 평생 치열한 미술 작업을 이어간 이야기. ‘광부화가들’은 1930년대 영국 잉글랜드 북동부 탄광촌 애싱턴에서 일어난 흥미로운 실화를 뼈대로 삼았다. 대본을 쓴 이는 글로벌 히트작 ‘빌리 엘…
록 뮤지컬 ‘아메리칸 이디엇’ ★★☆ 록 음악을 즐겨 듣지 않는다. 드럼과 베이스 소리를 넉넉히 소화할 귀를 갖지 못해서다. 록 밴드 ‘그린데이’의 동명 앨범 수록 곡으로 만든 뮤지컬 ‘아메리칸 이디엇’을 보고 나서 든 몇 가지 의구심에 확신을 갖지 못한 이유다. 도움을 청했다.…
배우들과 연출은 공연시간 80분 내내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처럼 긴장을 놓지 않았다. 무대 위 어느 한구석에도 소홀함의 기척이 없었다. 6·25전쟁 때 벌어진 양민학살 사건 녹취록을 재구성한 연극 ‘말들의 무덤’. 열흘간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15일 오후 무대에는 완벽한 마침표를 찍겠…
어느덧 마지막 곡이었다. 마치 긴 물음을 던지는 듯했던 ‘음악적 순간’ 6번은 긴 안녕을 고하는 듯 여운을 남겼다. 2007년 12월 베토벤 전곡 연주 마지막 날 소나타 32번의 2악장을 연주하던 백건우의 모습과 오버랩됐다. 베토벤과 리스트 이후 백건우가 향한 곳은 슈베르트였다. …
훔쳐보기의 쾌감은 숨어 있을 때 확보된다. ‘남몰래’라는 설정을 제거하면 미묘한 흥분도 사라진다. 7일 개막한 ‘노크하지 않는 집’은 관객이 다 함께 펼쳐놓고 여섯 여자와 한 남자의 다섯 방을 훔쳐보는 척하도록 한 연극이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