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불을 피우시고 곱창 같은 걸 손수 구워 자는 아이들을 깨운 다음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듯 여덟이나
아버지, 능소화가 뚝뚝 떨어지던 지난해 추석, 제 차가 마을을 돌아 큰길로 접어들 때까지 힘없는 팔을 높이 들어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은 다른 기억들에 비해 늦다. 다섯 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막 한글을 깨쳤을 때니까.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경기 안성에 사신다. 일요일마다 나는 그곳을 가족들과 함께 찾는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아버지가 묻힌 산을 내려오면서 아이들에게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 나왔다. “엄마는 이제 백이 없어졌다. 앞으로
만월홍안(滿月紅顔). 여섯 달의 투병 끝에 99년 1월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을 당신의 동료들이 추억하며
타향살이를 하는 이들에게 고향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은 보금자리인가보다. 이북이 고향인 실
아버지 조승초씨는 내가 대학 재학 때까지 살아계셨지만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14년이 되었다. 계절이 바뀌어 산소를 찾을 때 마다 우리 형제와 어머니는 이런저런 소원
어렸을 때 아버지는 가끔 우리 형제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자장면도 만들어 주었고, 양념을 바른 돼지고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