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에서 관에 올려진 민원성(民願性) 고문서를 가리켜 소지(所志)라고 한다. 이 소지류는 토지에 관한 문서 다음으로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의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은 제작 동기가 문벌(門閥)을 중시하던 조선 후기의 양반문화
한국인은 관계 속의 자리매김과 사귐에 익숙하다. 모듬살이가 필수적인 농경이 그 토양이었다면 타자와의 조화로운 삶
경북 안동 하회마을 북촌 댁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 중에 ‘도성팔도지도(都城八道之圖)’가 있다.
흔히 청백리(淸白吏)라면 부정·비리와 담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빈곤한 생활로 일관한 관료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
“제 집안은 본래부터 빈궁하고 가까운 친족도 없습니다. 그러던 차에 을해년(1815년) 대기근을 만나 아버지가
‘청구일기(靑邱日記)’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후손인 진성 이씨(眞城 李氏) 집안의 유학자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1
조선시대 정치는 사림의 공론(公論)에 토대를 두고 운영됐지만, 관료가 아닌 유생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
목판은 말 그대로 글씨나 그림을 새긴 나무판이다. 목판이라고 하면 보통 팔만대장경판을 떠올리지만 엄밀히 말하면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서고인 광명실(光明室)에 보관돼 있다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진 자료 가운데
‘일용지결(日用指訣)’은 성인(聖人)을 지향하는 선비가 따라야 할 일상의 지침을 제시한 일종의 ‘생활계획표’
조선후기는 사림(士林)의 붕당(朋黨)정치가 일당 또는 일족 중심으로 운영돼 가는 시기였다. 각 세력은 자파의 정치
조선시대 사관은 군주를 중심으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관료였다. 예문관(藝文館)에 소속된 사관
‘유교 10만 대장경 수집 국민운동’ 과정에서 재발견된 기록문화유산은 민족 전통문화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보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