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전원을 켜고 키보드 몇 번 누른 후 클릭하면 상대방에게 바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요즘 세상. 그래도 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지금이야 초등학교라 불리지만 지금은 그 시절을 회상하는 거니깐 힘주어서 ‘국민학교’
1970년대 별다른 놀이가 없었던 우리에게 보자기는 참으로 요긴한 물건이었다. 목에 걸면 슈퍼맨이 되었고, 허리에
1979년 여름, 처음 가 본 대구는 서울보다 훨씬 더 소비문화가 발달한 도시라는 느낌을 주었다. 특히 시내 중심가에
나와 남동생의 생일은 공통적으로 한 달의 마지막 날이다. 30여 년 전, 1개월의 짧은 산후휴가에도 전전긍긍 관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후반엔 요즘보다 겨울이 더 길고 추웠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당시 겨울 오락거리라고는
대학교 2학년 봄날이었다. 우연히 친구 따라 간 소극장에서 연극 연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연출하던 선배가 갑자기
그때 막내오빠에게서는 낯선 냄새, 이방(異邦)의 냄새가 났다. 이방의 낯선 냄새는 낡고 헌, 네모난 것들에서 나오
뭐니 뭐니 해도 1970년대는 ‘아버지들의 시대’였다. 한두 사람의 위정자가 서둘러 이끈다 해서 누천년의 농
연일 섭씨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기온 때문인지 두꺼운 옷깃 속에 목을 자라처럼 숨기고 몸을 웅크린 채 걸어 다녀도 체
지금은 대부분의 고교가 남녀공학이지만 1970, 80년대에는 거의 남학교와 여학교가 구별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
처지를 바꾸어 남을 헤아려 본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 내 몸을 쪼였다가 튕겨 나간 빛을 구부려 나를 다시 바라본다는
70년대 초중고를 다닌 나는 당시 최고의 오락이었던 만화에 푹 빠져 있었다. 형제가 많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우리 세대의 성교육은 중고교 시절 화장실에서 시작됐다. 도색잡지에서 오려 낸 고색창연한 누드사진이 첫 번째 대상
30년 전 대학 시절, 당시에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많지 않아 학생들은 늘 용돈이 궁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술자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