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1년간 연재한 ‘현대시 100년 사랑의 시·위안의 시’가 12일 막을 내렸
어느 날 공자가 자로, 염유, 증점, 공서화에게 만일 세상이 너희를 알아준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폐허’ ‘패배’ ‘실패’ 등의 단어는 발성법 자체에도 균열과 하강의 기운이 스며 있다. 파열음과 마찰음으로
꼭 이런 밤이었을 때 우리는 그게 누구든 한번 사랑하고 싶어진다. 알 수 없는 대상과 나누는 간절한 사랑은 꼭, 이
여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진이 막 일어났을 때보다, 지진이 끝난 한참 후 다시 아주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밀려오
소설 ‘변신’에서 카프카는 ‘벌레’가 ‘현대인’의 돌연변이임을 선언한 바 있다. 카프카를 편애하는 시인 박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있다. 해봐야 되지 않는 헛된 일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
이 시는 욕조 속에 가만히 몸을 말고 앉아 있다가 물에 잠긴 자신의 발을 보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단어들도 서로 사랑한다.” 노벨상을 받은 멕시코의 위대한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말이다. 파스의 말처럼, 이 시
용하야, 잘 지내고 있느냐. 오랜만에 꺼내든 이 시를 보니 우리가 해치운 술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기절시키려 하
이 시를 읽고 나면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 저녁이 옵니다. 서랍 속에 감추어 두었던 오래된 편지를 꺼내 읽고 싶은 마음이
이 기다림은 애절하고 날카롭다. 문을 향한 시선은 금방이라도 폭발하거나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문을 열고 들어
사랑을 잃은 남자는 우울하고, 사랑을 잃은 여자는 우아한가? 우울은 어둡고, 우아한 것은 슬픈 것인가? 어둠
아마도 이 시인은 하나의 음악을 상상하면서 이 시를 지었나 봅니다. 그 음악은 어떤 음악이었기에 이토록 마음을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바닥’과 싸우며 살아간다. 각기 처한 세계와 삶의 바닥이 다 다르므로, 누구도 다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