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추석이 되면 온 가족이 성묘하기 위해 몇 시간씩 산길을 걷곤 했습니다. 대중교통과 자가용이 귀하던 시절이라 먼 산길을 걸어 성묘를 가는 가족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성묘를 끝내고 동네로 돌아오면 그때부터는 아이들과 어울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쏘다니며 놀았습니다. 동네 어른…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어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 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넣어주십시오/지금 집이 없…
많은 사람이 정원을 갖고 싶다고 말합니다. 참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정원은 집의 다른 개념입니다. 정원이 아니라 그것이 딸린 집을 갖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냅니다. 그와 같은 표현을 통해 우리는 정원이 공간 개념의 산물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집을 짓고 남는 여분의 공간에…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가다가 곡목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노래인지 모르고 흥얼거리다가 문득, 광고에서 자주 듣던 노래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광고에 세…
법정 스님은 좋은 책은 거침없이 읽히되 읽다가 자꾸 덮게 되는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읽던 책을 자꾸 덮게 만드는 건 사유를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읽던 책을 덮고 조용히 앉아 자신을 들여다보는 정신의 여백을 만드는 순간, 마음의 번잡과 망상은 가라앉고 참자아가 우러나 지친 심신을 어루만…
아침마다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갑니다. 운동을 여유 있는 사람의 호사로 여기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이 놀라울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는 사람도 있지만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이 가장 많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걷는 사람의 물결을 지켜보노라면 공원이 한…
올해 스물여덟인 K 군은 대학을 졸업하고 반년 가까이 직장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변변한 직장을 찾지 못해 대학 시절에 하던 아르바이트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가까스로 영세한 논술학원에 일자리를 얻어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는 서울 변두리에서 학원이 있는 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고고하고 형형한 빛과 자태를 유지하는 게 있습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바로 그렇습니다. 고려 비색(翡色)의 독특한 아취와 백자의 다양하고 깊은 흰빛은 세월이 갈수록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신비감을 더합니다.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음미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모…
‘동안 열풍’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젊은 사람이건 늙은 사람이건 제 나이보다 덜 들어 보인다고 말하면 얼굴에 환하게 꽃이 피어납니다. 얼굴과 몸매 관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많다 보니 자신의 나이가 몇 살로 보이냐고 내놓고 묻는 여성도 있습니다. 실제 나이보다 아래로 짚으면 …
음주 문화는 민족의 고유 정서를 반영합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의 음주 전통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은 단연 풍류(風流)입니다. 물과 바람은 자연스러운 흐름의 상징이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음의 표본입니다. 신라의 화랑도도 풍류도를 바탕으로 했고 조선시대의 음악,…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되면 절로 탁족도(濯足圖)가 떠오릅니다. 탁족도란 강이나 계곡의 물에 발을 담근 선비나 은사(隱士)를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개 한 사람인데 유독 두 사람이 등장하는 탁족도가 있습니다. 낙파 이경윤(駱坡 李慶胤)의 ‘고사탁족도(高士濯足…
요즘도 종이에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 편리한 e메일을 사용하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다 보면 아주 오래전, 밤잠 설쳐가며 써대던 절절한 연애편지가 생각납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장 한 장, 나의 숨결과 정성을 담아 꾹꾹 눌러 써대던 글자들은 지금도 우주 공간 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처음 읽은 건 고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1976년에 출간된 정가 500원짜리 영한 대역판 문고본은 사춘기 소년에게 풍요로운 영감의 날개를 펴게 했습니다. 소행성 B612에서 한 송이 장미와의 관계 맺기에 실패한 어린왕자는 마음에 상처를 받고 다른 별의 세계로…
‘마담 보바리’는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대표작이자 처녀작입니다. 평범한 시골의사인 보바리의 아내 에마는 몽상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두 명의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다 빚에 몰려 비소를 먹고 자살에 이릅니다. 오늘의 안목에서 보자면 진부한 불륜소설이 아닐 …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신흠(申欽) 선생의 수필 중에 ‘야언(野言)’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요즘은 여(與)나 야(野) 하면 으레 정치적 입장을 떠올리지만 조상에게 있어 야(野)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전원이라서 군자의 정신적 배경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