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나의 삶을 ‘진흙탕의 길’로 부른다. 불교정화운동과 종단 개혁 과정에서 숱하게 세속적 환경과 부대끼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때로 대처승들에 맞서 목소리를 높였고, 1980년에는 총무원장으로 종단 개혁에 나섰다 신군부에 의해 법난(法難)을 겪었다. 어느 때는 폭력사…
총무원장으로 있던 1995년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선언했다. 1996년에는 실무기획단을 구성해 이론적, 조직적 토대를 구축하고 약 20억 원의 기금도 조성했다. 이후 종단 차원에서 노동과 인권, 복지, 환경, 통일 사업에 나섰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 설…
10일 태국 방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곳에서 6시간여를 기다린 뒤 다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최종 목적지는 비엔티안에서 차량으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나응옴마이. 이곳에 새롭게 지은 초등학교 준공식에 참석한다. 라오스는 인도차이나 반도 중앙에 있는 내…
2010년 1월 캄보디아 캄포트 주의 한 고교에서 ‘생명의 우물’ 1000기 완공 기념식이 열렸다. 행사에는 캄보디아 농촌개발부 체아 소파라 장관과 현지 주지사, 이 지역의 학생과 주민들이 참석했다. 캄보디아 국왕은 장관을 통해 나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행사가 진행될 때 주변에서는 “…
2003년 10월 국제개발구호 비정부기구(NGO)인 지구촌공생회를 창립했다. 종단 개혁을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한 뒤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뒤였다. 자연스럽게 민족의 울타리를 벗어난 지구촌 현실에 눈길이 갔다. 이에 앞서 강문규 서경석 목사 등이 찾아…
내가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91년 대구에서 일어난 페놀 무단방류 사건이 계기가 됐다. 그 사건은 환경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것임을 보여줬다. 당시 우리 사회는 대통령 직선제로 부분적인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사회민주화와 생존권 보장이 당면 과제였다.…
2일 입적한 지관 스님과 나는 1950년대 후반 처음 만나 50여 년간 인연을 맺어왔다. 종단의 종회의원과 동국대 이사로 오랫동안 함께 활동하며 종단과 동국대의 대소사를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무상한 육신으로 연꽃을 사바에 피우고/허깨비 빈 몸으로 법신을 적멸에 드러내네/팔십년…
2006년 7월 대북정책의 진로를 토론하는 모임에서 한 나의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자 큰 논란이 불거졌다. 강문규 손봉호 이세중 박세일 이각범 씨 등 30여 명이 모여 대북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했지만 북한은 미사일 발사 …
최근 종교 간 갈등과 정부의 종교 편향 시비가 불거졌지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내가 총무원장으로 있던 시절에도 크고 작은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한 달을 갓 넘긴 1993년 4월에는 한 부대의 지휘관이 자신의 종교와 다르다는 이유…
3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지켜본 시민운동은 민주주의를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다. 1988년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에 참여할 기회가 왔다. 그해 6월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와 작고한 김지길 목사가 함께 활동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이른바 ‘1노…
1982년 10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무리 수행자라고 해도 1980년 10·27 법난 뒤 1년 동안은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출가한 뒤 처음으로 종단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아 포부를 펴려고 했지만 타의에 의해 7개월 만에 물러났으니 그 상처를 달랠 길이 없었다. …
1956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출가했을 때 바깥세상은 궁핍과 대립, 혼돈의 연속이었다. 세상의 번뇌를 끊을 진리를 찾아 나섰지만 그 길은 쉬운 게 아니었다. 자연을 벗 삼아 여법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의 삶에 이끌려 출가했지만 막상 발을 들여놓고 보니 출가 생활 역시 녹록하지 않았다. 바깥…
1953년 말 서울에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셋째 형의 서울 집에 기거했다. 6·25전쟁은 끝났지만 도시 곳곳에는 그 상처가 남아 있었다. 여기저기 미처 복구하지 못한 건물의 잔해도 그대로였다. 먹을 것이며 입을 것이며 모든 것이 부족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
내 고향은 전북 정주시 산외면(山外面)이다.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읍시에 속한다. 타지 사람들은 이곳을 풍수적으로 모래펄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양새, 평사낙안(平沙落雁) 형의 명당 터라고 했다. 노령산맥의 줄기인 575m의 상두산(象頭山)도 있다. 부처님이 설법을 펼친 산의 이름…
역대 총무원장 선거 중 1999년 11월 치러진 제30대 총무원장 선거만큼 우여곡절이 많은 경우는 드물었다. 앞서 고산 스님이 제29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됐지만 선거 공고 절차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법원의 판결로 다시 선거를 치러야 했다. 선거는 지난번처럼 고산 스님과 지선 스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