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 미제라블’(이하 ‘레미즈’)은 1996년 국내에 처음 상륙했다. 동아일보 주최,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였다. 국내 공연계엔 이 작품을 접한 뒤 ‘내 생애 최고의 뮤지컬’로 꼽는 이가 수두룩하다. 레미즈는 당시까지만 해도 뮤지컬 하면 떠올랐던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를 …
국립극단이 올해 선보인 삼국유사 시리즈 중 레퍼토리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드라마가 탄탄한 작품이 나왔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김부(金傅)대왕전’의 내용을 토대로 한 ‘멸(滅)’이다. 김부대왕은 신라 천년사직 최후의 왕 경순왕을 말한다. 김부는 후백제 견훤의 기습공격에 허를 찔려 포석정…
블랙 워치는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부대명이다. 스코틀랜드는 1731년 영국에 병합되기 전 독립 왕국 시절부터 무용(武勇)으로 유명했다. 그 스코틀랜드인으로 구성된 부대인 블랙 워치는 이미 1745년부터 해외에서 용맹을 떨쳤다. 대영제국의 팽창과 더불어 북미, 인도…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가시적인 사물들에 사로잡히거나 그 일부가 되지 않고서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메를로 퐁티, 1968년쯤.” 서울 명동 프린스호텔 뒤쪽 남산 자락 아래 한 좁은 골목길을 서성일 때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이런 목소리에 당신은 멍해질 수밖에 없다. ‘서울 시내…
고대 그리스어(헬라어)에서 나온 미토스(신화)와 로고스(이성)는 모두 ‘말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다. 미토스가 신이나 왕족, 영웅이 말할 때 쓰인 동사 미테오마이(mytheomai)에서 나온 반면 로고스는 여자나 노예, 모략가가 말할 때 쓰인 동사 레게인(legein)에서 파생했…
희생은 핏빛의 단어다. 오늘날 희생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는 숭고한 행동으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이 거룩한 단어에는 ‘살인의 추억’이 숨어 있다. 본디 희생이란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소와 양 같은 가축뿐만 아니라 인신공양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
죽음은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삶의 연속인 걸까, 아니면 새로운 삶을 위해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매듭인 걸까. 대조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응시한 연극 두 편이 나란히 공연 중이다. 하나는 20세기 초 미국 동북부 작은 마을을 무대로 한 미국 극작가 손턴 와일더의 ‘아워 타운’(한태숙…
3년 전에 비해 단단해졌다. 초연될 때만 해도 어딘가 성긴 구석이 엿보였던 극단 여행자의 ‘페르 귄트’(양정웅 재구성·연출)가 배우들의 능란한 화술과 숙련된 앙상블로 외국에서도 통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방대한 원작을 응축하면서 이를 현대적 무대와 비주얼로 풀어낸 이 작품에 대해 호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대중에게 비비언 리와 말런 브랜도의 영화로 각인돼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의 이 작품은 희곡으로 쓰여 1947년 브로드웨이 초연작이 855회나 공연되는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연출가 엘리아 카잔이 이를 1951년 영화로 찍으면서 주요 배역을 연극 출연진…
어떤 연극은 외면과 속살이 다르다. 그래서 무심코 연극을 보러 왔다가 어리둥절해지는 경우가 있다. 3∼9일 서울 대학로 눈빛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몰리 스위니’(송선호 연출)가 그런 작품이었다. 홍보자료에는 아일랜드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 원작의 이 연극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국립극단이 야심 차게 기획한 삼국유사 프로젝트의 첫 작품은 놀랍게도 한국사회의 해묵은 금기어를 꺼내들었다. 바로 ‘친일’이다. 친일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압도적 시각은 ‘개인적 입신양명을 위해 민족이란 대의명분을 배신한 자들에 대한, 준엄한 역사적 단죄’의 관점이다. 광복…
“인간은 실수를 하고 신은 용서를 한다”라는 서양 속담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 실수의 대상이 신의 고유 영역, 곧 생사의 문제라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실수를 곧 신의 용서로 대체해버려도 되는 걸까. 26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대학로 코미디페스티벌 참가작으로 공연…
‘어 캔디 컬러드 클라운 데이 콜 더 샌드맨/팁토즈 투 마이 룸 에브리나잇/저스트 투 스프링클 스타더스트 앤드 투 위스퍼/고 투 슬립, 에브리싱 이즈 올 라잇’ 로큰롤 역사상 최고의 미성을 자랑하는 로이 오비슨의 ‘인 드림스’(꿈속에서)의 첫 구절이다. 샌드맨(모래인간)이라고 불리는 …
일본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양심적 지식인들의 좌장 격인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90)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 일본사상사를 지배한 키워드로 각각 ‘전향’과 ‘대중문화’를 꼽았다.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까지 ‘15년 전쟁’ 기간에 엘리트 지식인의 사상적 방황…
메디아 또는 메데이아는 그리스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자 중 ‘가장 센 여자’다. 요즘 말로는 팜 파탈, 옛날식으로 독부(毒婦)란 표현만으론 그를 온전히 묘사할 수 없다. 고대 조지아(옛 그루지야) 서부 콜키스 왕국의 공주였던 그는 사랑하는 남자 이아손을 위해 부왕과 조국을 버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