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통은 물과 같다. 고여 있으면 썩고, 흘러넘치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염된다. 그게 바로 한국인들이 말하는 한(恨)이다. 극단 고래의 창단공연 ‘빨간시’(이해성 작·연출)는 그 한의 드라마다. 연극은 그 한을 3대에 걸친 비극적 가족사에 십자수 형태로 새겨 넣었다. 자신이 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말한다. 역사란 기억의 구성물일진대 그 기억이라는 것이 어차피 주관적 착오와 편견의 산물이므로 객관적 역사란 존재할 수 없다고. 정신분석가들은 말한다. 어차피 인간이란 환상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당신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 그 자체가 환상일 수 있다…
요즘 대학로 연극에선 보기 힘든 대작이었다. 출연배우만 39명. 두 가지 이상 배역을 맡은 배우들까지 합치면 7세 소년부터 70대 노인까지 60명에 이른다. 상연시간도 15분의 중간 휴식시간을 포함해 3시간으로 대형 뮤지컬을 능가한다. 연극이지만 뮤지컬 뺨치게 무대전환도 많았다. 조금…
《공연 시작 전 빨강과 검정 가로줄이 쳐진 무대 막 한가운데에 셰익스피어의 얼굴이 둥실 떠있었다. 말년의 초상화라 늙어 보이지만 그는 53세로 숨을 거뒀다. 이날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연출한 연출가는 그보다 23세나 더 먹은 노장이다. 무대 막이 걷혔다. 3면의 벽과 바닥이 모두 흰색인…
정신병에 걸린 주인공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연극 ‘에쿠우스’와 ‘신의 아그네스’의 계보를 잇는다. ‘에쿠우스’가 순수한 사춘기 소년, ‘신의 아그네스’가 순진무구한 처녀의 광기를 탐험했다면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브라이언 요키 작, 톰 킷 작곡)은 그런 아들과 딸을 둔 중산…
‘괴물 작가’ 김지훈의 우상파괴 3부작의 마지막 작품 ‘판 엎고, 퉤!’가 공개됐다. 지난여름 밀양여름공연축제에서 ‘밥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첫선을 보였던 작품을 대폭 손봐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 무대에 올렸다. 1부 ‘방바닥 긁는 남자’(이윤주 연출), 2부 ‘길바닥에 나앉다’(오동…
파우스트는 중세 유럽의 인기 레퍼토리였다. 세상 모든 학문을 섭렵한 학자와 약아빠진 악마의 내기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대중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는 ‘빅 매치’였기 때문이다. 괴테는 이 대중적 스토리를 새롭게 엮어서 모순과 역설의 레제드라마(공연보다 독서를 목적으로 쓴 희…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접한 사람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어린애 장난 같다고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치거나, 뭔가 심오함이 숨어 있다고 믿으며 숨을 멈추거나. 만일 당신이 후자라면 이 연극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연극은 로스코의 생애를 훑지 않는다. 예술가의 변덕이…
꿈과 신화는 닮은꼴이다. 연극 ‘지하생활자들’은 그 틈을 파고든다. 누군가에게 납치돼 가사상태에 이른 여인의 꿈과 한국의 뱀신랑설화를 병치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결코 따뜻한 환상이 아니다. 지극히 차가운 현실이다. 뱀신랑설화는 그리스신화 속 프시케 이야기를 닮…
연극이 시민의 오락거리에만 머물러선 안 되고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게 브레히트였던가. 그렇다면 21세기 시민교육을 위해 연극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일본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는 이를 과학에서 찾는다. 그의 ‘과학하는 마음’ 연작은 유전자공학, 영장류 연구, 뇌과…
연출은 무엇보다 공간의 미학이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대사를 풀어놓는 것이 극작가의 몫이라면 그것을 텅 빈 무대 속에 어떻게 좌표화해서 채워 넣을 것인가에 대한 입체적 상상력은 연출가의 몫이다. 30일, 1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은 그…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우리에게 익숙한 해님달님 설화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대사다. 산골마을에 남매를 두고 잔칫집에 품 팔러온 엄마가 잔칫집에서 준 떡을 싸들고 귀가하다가 만난 호랑이로부터 듣는 말이다. 이 말은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열려라 참깨’에 비견할 만큼 한국인의 의식세…
뱀파이어와 좀비 그리고 프랑켄슈타인(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의 공통점이 뭘까. 죽었지만 죽지 않은 존재라는 점이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통찰을 펼쳤다. 인간은 두 가지 양태로 존재한다. 산 자(the living)와 죽은 자(the …
유럽 연출가와 국내 배우들이 짝을 이룬 연극 두 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대에 올랐다. 국립극단이 기획한 ‘보이체크’와 명동예술극장이 기획한 ‘우어(Ur·原)파우스트’다. 두 작품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모두 독일 고전 희곡을 토대로 한 작품이란 점은 닮았다. 우어파우스트는 독일 문학…
“가수의 애절한 노래는 끝나지 않았건만 암살자의 총에 비명횡사한 저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가, 새벽녘 호위해줄 경호원도 없이 바위 위에서 몸을 날려 온몸으로 으깨어져야 했던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가.” 이것은 햄릿의 대사다. 박정희와 노무현이라는 대조적인 ‘부왕’의 망령이 지배하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