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르웨이의 숲은 영원히 날 가둬버린 것 같았다. 오슬로에서 베르겐으로 가는 기차 창밖에는 자작나무가 끊임없이 늘어서 있었다. 창백하고 가녀린 몸 전체를 흔드는 그들의 애처로운 인사는 작별인사인지 환영인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서 와, 잘 가, 어서 와, 잘 가, 어서 와….…
공포영화 감독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을 탐구하는 전문가다. 공포영화를 보다 보면 그들의 연구개발 성과를 확인하게 된다.인간은 무엇을 두려워할까. 죽음? 그렇지 않다. 사람을 간단하게 죽이기만 하는 공포영화를 본 적 있나. 사람들은 죽음보다 신체 훼손을 두려워한다. ‘쏘우’를…
학생식당에서 식권을 살 때면 늘 배식구를 따라 늘어선 줄의 길이를 먼저 확인하던 그. “아무거나 먹으면 어때. 굳이 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잖아.”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바지락 칼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 가게 앞에서 한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였다…
#1 우리 집에 자가용이 생긴 건 내가 중학교 때였을 거다. 가뜩이나 말수가 적었던 난 형이 모는 차를 타면 침묵과 공상의 세계로 더 깊이 빠져 들었다. 카오디오로 듣는 음악은 환상적이었다. 밀폐된 작은 공간에서 끝없이 몰아쳐 오는 음향의 파도는 고막과 숨통을 조여 왔다. 내 뇌를 전…
자동차 담당 기자를 1년 반 넘게 하고 시승기도 여러 건 써봤지만 막상 운전을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편이다. 주변에 딱히 윤화(輪禍)를 입은 지인도 없는데,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를 무서워했다. 내가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는 가해자가 되는 게 더 두렵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끔찍한 …
가끔 남자들이 내게 묻는다. “아내에게 뭘 선물하면 좋을까요?” 쇼퍼홀릭인 나는 신용카드를 맡아 쥐고 백화점에 나온 양 신이 난다. ‘몇 층으로 가야 할까.’ 빙빙, 카드를 돌리며 말한다. “다음 질문에 답하시오.” 부인 나이와 외출 시 옷차림과 메이크업은? 구두 힐의 높이, 액세서리…
그가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건넸다. “앞장에 짧게 글 하나 썼어.” 누가 기자 아니랄까 봐. 책을 펼쳤다. 오렌지색 종이 위에 또박또박 그려진 검은 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사직서를 쓰겠다고 말한 날.’ 갤럭시S3 화면에서 ‘전화…
#1 “저… 선생님, 저…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돼요?” 교실에서는 그날도 폭소가 터졌다. “야, 쟤 또 화장실이냐? 푸핫!” 아이들의 숙덕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잔뜩 흐려져 곧 비가 퍼부을 듯한 하늘 같은 표정으로 달려 나갔다. 배앓이는 그 무렵부터 내 우울함의 원인이었다. 복통은 대…
30대가 여러 명, 40대도 더러 있는 친목 모임에 최근 참석했다. 그중 가장 나이가 어린 멤버가 실연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대화가 오가는 중에 어느샌가 ‘힐링 캠프’ 같은 분위기가 됐다. 그리고 ‘패널’의 절반 정도는 살짝 연애 시절로 돌아간 기분과 함께 길티 플레저(guilty …
유유상종. 사자성어엔 일종의 통계적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와 친한 A 씨와 나와 친한 B 씨는 서로 잘 어울릴 거라 믿는다. 그러니 내 절친 A를 절친 B에게 소개했을 때 백아절현(伯牙絶絃·진정으로 친한 벗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말함)의 조짐은 기대조차 안 했다. 그저 다…
나흘 전 동생이 여행 가방의 명품이라 불리는 투미(TUMI) 상표가 찍힌 지갑 하나를 들고 왔다.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손님이 줬어”라고 짧게 덧붙였다. 선배 한 사람이 메고 다니던 투미 가방이 떠올랐다. 여자친구가 사준 것이라며 자랑하던 선배가 말해준, 70만 원이라는 가격과 함께…
정부기관을 출입하다 보면 ‘IO(Information Officer)’라 불리는 국가정보원 소속 직원들을 종종 마주친다. 국내 담당인 2차장 산하에는 일부러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만 배치하는 건지, 제이슨 본 같은 분위기의 요원은 한 명도 못 봤다. 거리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인상의 …
“큰지 작은지 입어보면 알거 아니에요. 고객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 내가 뚱뚱하다는 말이야?” ‘뚱. 뚱. 하. 다’는 단어가 블랙홀처럼 소란을 빨아들였다. 이건 ‘쇼핑학적으로 옳지 않은’ 표현이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격렬…
《 “아무리 괴로워도, 죽음보다 더 괴로울지라도, 단지 살아줘” -‘유성의 인연’(일본 TBS·2008) 》 악몽은 그날도 반복됐다. 올해 4월 11일 오후 8시 무렵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뇌병변 1급 장애를 지닌 언니의 머리채를 붙잡고 화장실 타일 벽에 찧어댔다. 쿵쿵쿵…. 몇 …
《 ‘오, 단순한 것… 넌 어디로 갔니?’-킨 ‘Somewhere Only We Know’(2004년) 》 그이는 한때 여기 있었다. 웃었고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렸다. 내리쬐는 햇살에 그이는 눈을 찡그렸지만 도시는 거대하지 않았다. 상업이나 공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이를 위해 존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