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수의 외국 시장 진출은 한류 이전에도 존재했다. 트로트의 전설인 이난영의 두 딸과 조카로 이루어진 김시스터스가 미국 CBS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고 코스터스의 곡인 ‘찰리 브라운(Charlie Brown)’을 리메이크한 노래로 빌보드 R&B 차트에 오른 것이 19…
1966년 2월, 장구한 한국 트로트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중의 한 사람으로 영원히 남게 될 스물넷의 음악 청년에게 급성 신장염이라는 당시로서는 불치의 병마가 급습했다. 한국의 병원에선 신장 투석도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헌칠한 키에 어울리는 정장과 넥타이, 그리고 이지적인…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붐의 가장 그늘진 곳, 헤비메탈 밴드 문화는 소수 극렬 마니아들의 불타는 열광에도 불구하고 오버그라운드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 밴드들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을 호령하게 될 위대한 보컬리스트들을 배출한다. 이승철은 이 밴드 무브먼트 속에서 오늘날까…
어느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보컬 하나만으로도 예술을 넘어 접신의 경지에 오른 여성 대중음악가,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차트의 톱을 차지한 적이 없지만 이 땅의 진지한 음악 수용자들로부터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지지를 한결같이 받아 온 한영애(사진). 그의 음악적 뿌리는 세계 대중음악의 …
1996년 6월 7일 저녁 서울대 대강당을 빽빽이 채운 2000여 관객들은 하나의 작은 기적을 체험한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이후 60여 년 만에 음반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 쾌거를 기념하는 ‘자유’ 콘서트의 중간 순서쯤, 두루마기 차림으로 나온 중년의 한 사내가 내뿜은, 도도한 …
정치적으로는 긴급조치, 경제적으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의 1978년 늦은 가을, 대학가의 은밀한 신화가 된 김민기가 분단 이후 최초의 지하 음반인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송창식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담요를 두르고 녹음하고 있을 때 문화체육관의 하얀 그랜드피아노 앞…
197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혁명적 낭만주의의 미학이 자유분방하게 개진되던 연대기라고 할 수 있고 198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양지와 음지 모두 강렬한 카리스마가 분출되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면 1990년대의 그것은 아마도 스타 시스템에 기반한 재능과 개성이 백가쟁명을 이룬 시대…
폭발적이면서 동시에 호소력 넘치는 서정성을 겸비한 당대의 보컬리스트 이선희는 1984년 강변가요제에서 ‘J에게’로 신데렐라의 꿈을 이룬 후 2005년 13번째 정규 앨범 ‘사춘기’에 이르기까지 조용필의 대척점에 서서 한국 주류 대중음악의 영광을 구가해 왔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이…
양희은의 당당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1970년대 자유주의 청년 세대의 상징이었다면 결핍과 슬픔을 승화하는 강력한 연민의 울림을 지닌 김광석의 목소리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 청년 세대들의 영원한 동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광석은 짧은 생애 동안 고작 네 장의 정규 앨…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뒤돌아보며는 외로운 길/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지금 나 여기 있네….’ 1989년 가을, 개관 이래 11년간 국제가요제 같은 특별한 이벤트를 제외하고는 대중음악인에게 단 한 번도 무대를 내주지 않았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의 완고한 문턱이 데뷔 30주년을 …
1982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문세의 데뷔 앨범엔 ‘가는 사람 갈지라도’와 ‘그날처럼’이라는 두 곡의 자작곡이 실려 있었다. 1970년대 한국을 수놓았던 통기타 싱어송라이터의 꿈을 품은 이 청년의 이상은 같은 해 발표된 조용필의 ‘비련’과 이용의 ‘잊혀진 계절’ 같은 위대한 러브…
단 하나의 곡이 한 나라 대중음악 문화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을 수 있겠는가? 암울한 식민지에서 음반산업의 시대를 열어젖힌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그 노랫말처럼 파란만장한 한국 대중음악사의 불우한 숙명을 암시하는 것이었다면, 1971년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의 또렷하고 당돌…
2010년 신승훈의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두 장짜리 베스트 앨범의 머리곡은 ‘You Are So Beautiful’이다. 1970년대 조 카커의 노래에서 제목과 첫 번째 두 마디 주제를 빌려 온 이 노래는 20년 동안 놀라운 절제력과 집중력을 발휘하며 단 한 번의 실족도 없이 견고…
1966년 서울 서라벌예고 2학년생이던 최홍기가 가수 나훈아로 다시 태어나는 데엔 그 자신의 말로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까까머리 소년은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사실상의 데뷔곡이 된 ‘천리길’과 그의 출세작이 된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네 곡을 단숨에 녹음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그…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1980년의 어두운 사회를 위안할 바로 그 즈음 슬며시 발표된 김현식의 데뷔 앨범을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무려 5년 뒤 들국화가 화려하게 데뷔하기 직전 그의 두 번째 앨범이 나왔을 때 그의 이름은 바로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가장 중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