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만나는 시의 12월 추천작은 박장호 시인(39)의 ‘태양은 뜨자마자 물든 노을이었다’다. 2003년 ‘시와세계’를 통해 등단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포유류의 사랑’(문예중앙)에 실렸다. 추천엔 김요일 신용목 이건청 이원 장석주 시인이 참여했다. 박 시인은 이번 시집을 “몸…
유리창에 성에가 낀 고요한 겨울밤, 눈을 기다리는 ‘나’는 잠들지 못하고 있다. 그는 서랍 속 여름옷을 꺼내 펴보거나 부엌 싱크대 물을 틀며 서성이고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그는 희박해지고, 희미해진다. 그는 마지막 애인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며 꽃을 선물하고 싶어 한다. 결혼식 부케…
“시에서 말하는 자는 ‘저녁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낮의 소란과 소동이 사라진 저녁에 노동에서 놓여난 ‘빈손’을 문득 들여다보면, 혹은 버려진 듯한 ‘두 손’을 모으면, 무엇인가 간절해지고 슬퍼지고 적막해지고 그리워지는 기분에 감싸이는, 그런 저녁을 가진 인간의 초상을 그려보고…
살인자와 그림자들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시체를 자루에 싸서 옮기려 한다. 일당은 순찰 중인 경찰관과 마주치지만, 경찰은 시체의 허벅지살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 한 패가 된 경찰 눈엔 시체도 지푸라기와 고구마로 보일 뿐이다. 심지어 한입 깨어 물기까지 한다. 섬뜩한 시엔 마침표가 없다…
아무도 모르는 늪지대에서 두 그루의 식물이 만난다. 늪지대는 어딘가 쓸쓸하고 슬픔이 깃든 곳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한 자리만 지키는 식물끼리의 만남은 무가치해 보이지만 그 사이에도 두근거림이, 깊은 교류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감히 생각할 수 없을 뿐이다. 외로움이 깊이 새겨진 시적…
아빠 앞에서 열여섯 살 딸이 울었다. 인생에 대한 아빠의 조언이 간섭처럼 느껴졌는지도, 딸의 진심이 아빠에게 전달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평소 살갑게 굴던 딸의 침묵에 어색한 아빠는 말없이 연필을 꺼내 연필깎이에 넣고 돌린다. 사각사각 연필이 깎이는 소리는 딸의 마음이, 그리고 아빠의…
미국령, 프랑스령, 영국령…. 태평양에 떠 있는 섬들 이름 앞에 흔히 볼 수 있는 수식어다. 문명 전파의 사명감, 외침(外侵)으로부터의 보호, 무역이나 통상 확대 등 이런 수식어가 붙게 된 명분은 다채로웠지만, 그 실상은 제국주의 열강의 ‘땅 따먹기’ 경쟁의 결과였다. 사실 일평생 구…
경상도 뱃사람들이 ‘먹태’라고 부르는 바닷고기가 있다. 다른 물고기들이 피해가는 빠른 물살 속에서 살다 보니 지느러미를 한시도 놀릴 틈이 없다. 먹태는 그가 사는 곳이 규정해준 이름일 뿐. 평생 거센 물결과 싸우느라 그 자신도 잊어버린 진짜 이름은 ‘명태’다. 이달에 만나는 시 4…
걸음을 뗄 때마다 두 발이 푹푹 꺼지는 열사(熱沙)의 한복판. 얼마나 왔는지 돌아봐도 뒤따르던 발자국은 모래바람에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온 방향을 알 수 없으니 갈 방향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몸을 틀고 방향을 바꿔보지만 엇비슷한 모래언덕의 연속이 무수한 동심원처럼 나를 둘러…
체스판 양 끝에 도열한 두 무리의 군대. 그 최전선에는 동그란 머리를 가진 졸개 ‘폰’이 가지런히 열병해 있다. 동양 장기의 졸(卒)에 해당하는 이 말은 앞으로밖에 나갈 수 없지만 맞은편 체스판의 끝에 도달하면 주교나 기사로 변신할 수 있다. 보통 다음 수를 위해 희생되는 이 졸이 과…
등이 굽은 늙은 목수의 손때 묻은 연장 가방에서 ‘와르르’ 연장이 쏟아져 내린다. 목수와 함께 나이를 먹으며 반질하게 닳은 가죽 가방의 지퍼가 연장의 무게, 아니 세월의 무게를 못 이기고 뜯어져 버렸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고통스럽게 입을 쩍 벌린 지퍼를 여며 쥐고 가방을 쓰다듬…
사람의 손은 그의 일생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하얗고 긴 손가락에는 고생 모르고 자란 백면서생의 물정 모름이, 까맣게 기름때가 낀 손톱이나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는 육체노동의 고단함이, 화려한 매니큐어가 내려앉은 손톱에선 삶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여기 아내의 손이 있다. …
서울 여의도의 금융회사 밀집 구역에는 특이한 모양의 고층 빌딩이 있다. 두 개의 사각 기둥이 뻗어 올라가다 허리춤 정도 높이에서 한쪽 기둥이 휘어져 다른 쪽 기둥에 맞닿은 모양이라 지나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런 빌딩은 예외다. 하늘을 향해 함께이되 결코 만날 수는 …
술집 문이 열리더니 어깨가 축 처진 사내가 홀로 들어와 구석 자리에 앉는다. 며칠째 비 없이 흐리기만 한 바깥 날씨는 메마른 사내의 마음 빛깔이다. 오래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 받았는지도, 직장에서 ‘그만 나와도 좋다’는 말을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내는 평소 잘 마시지 못하는 소주를…
퇴근길 해질 어스름 무렵의 시장 나물전에 앉은 여인이 “떨이요, 떨이”라고 외친다. 좌판도 없는 길바닥 인도에 엎드리다시피 한 자세로 한낮의 먼지와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하루 종일 다듬은 나물을 미련 없이 털어 낼 시간이다. 지금을 놓치면 시들어 버릴 나물도, 허리 한 번 못 펴고…